백업하는 닛
[쿠로켄]봄 눈 시린 11 (+) 본문
쿠로오가 내려 꽂다시피 한 서브가 상대편 누구의 손도 건드리지 못하고 코트 안으로 떨어졌다. 뒤이은 함성에 쿠로오 자신이 낸 소리는 묻힐 정도였다. 호루라기 소리가 또 들리고 다시 경기장은 조용해졌다. 그러나 어딘가 긴장의 끝을 놓지 않는 불안함의 침묵이었다. 가벼운데도 장내를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하늘로 솟구쳤다. 그리고….
“결승행 티켓을 손에 넣으며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립니다!”
쿠로오의 강력한 서브 후 몇 번의 랠리 끝에 보쿠토가 날아올랐다. 카게야마의 세밀한 셋업과 최강의 미끼 히나타의 페인트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다들 모여 쿠로오의 등을 쳤다. 시합 내내 날이 서 있던 쿠로오도 헤실헤실 풀어져 환히 웃었다. 마치 옛날과 같았다.
“요즘 잘 지내?”
옷을 갈아입던 쿠로오가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매일 보다시피한 녀석이니 분명 몰라서 묻는 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기울이며 뚱한 표정을 지은 채 잠시 바라보자 “그 사람하고?” 라고 덧붙였다.
“아아….”
“이번엔 좀 괜찮아?”
누군지 모르면서 저번과 이번을 나누냐? 라고 말하려다가 쿠로오는 그냥 장난스럽게 입을 다물고 씨익 웃기만 했다. “왜? 걱정 돼?” 그렇게 말하니 보쿠토가 살짝 인상을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 벌써 한 달 정도 점심시간에 차도 안 빌려가고 하니까. 점심에 데이트하는 줄 알았는데 그렇다고 네가 차를 산 것도 아니고.”
“음…. 확실히 점심 때 만나는 건 앞으로 좀 힘들 것 같아서 말해뒀어.”
“그래도 돼? 괜찮대?”
“뭐, 대신 퇴근하고 내가 집에 가니까.”
그 말에 보쿠토가 충격 먹은 얼굴로 들고 있던 옷을 놓쳤다. 무거운 물건이었다면 쿠궁! 하고 본인의 충격 상태를 소리로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섬유는 그저 톡, 하는 소리만 내는 게 고작이었다.
“집에 간다고오?!”
대신 보쿠토의 목소리가 커졌다. 쉿, 시끄러워! 쿠로오가 얼른 주변을 살피며 입을 막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주변 동료들이 시끄러워지는 걸 보고 쿠로오는 얼버무린 후에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보쿠토를 달래야만 했다. 모든 걸 알고 있는 히나타만 큭큭 몰래 웃었고 카게야마는 그런 히나타를 의아스럽게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아니이….” 목소리를 한껏 낮춘 보쿠토가 쿠로오에게 찰싹 옆에 붙어서는 말을 이었다. ‘나중에’라는 표현은 지금 보쿠토에겐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누구 집에 간다는 거야? 서, 설마 그…그 사람 집?”
“그런데.”
“진짜아? 너 그 정도의 사이가 된 거야?”
“음…그 정도의 사이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네 예상에 비해선 아직 그렇게 친한 건 아닌데…….”
“집에 가는데 사이가 안, 좋다고?”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걸 본인도 자각한 모양인지 얼른 입을 한 번 스스로 틀어막고 숨을 잠시 끊은 후에야 다시 목소리가 작아졌다. 쿠로오는 곤란한 듯이 머릴 긁적였다. “나중에 다 설명해줄게.” 라고 말하지만 그게 벌써 몇 번째였던 지라 보쿠토는 또 눈을 흘겼다. “너 어쨌든 조심해. 별로 안 친하다고 하지만 내가 봤을 땐 수상하다고.” 그 말에도 틀린 건 없었다만….
“테에츠, 오늘도 늦-었어!”
모순인데도 가끔은 성립하기 마련이었다. 쿠로오는 허허 웃으며 현관문에 매달린 에이키를 떼서 제 품에 안아들었다. 그리고 거실에 물을 마시고 있던 켄마와 시선이 마주쳤다. 켄마는 미세하게 흠칫 놀라고 설렁설렁 목례하고는 컵을 입에서 떼지 않고 그대로 제 작업 방에 가서 문을 닫았다.
완전히 서먹한 사이의 사람과 교류하던 때의 켄마의 행동 1이라 쿠로오는 괜히 눈물이 나기도 하고 그래도 완전 없는 사람 취급하지 않으니 천만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애써 자기 위로를 해야 했다.
“오늘 테츠 배구 봤어!”
“봤어?”
“응, 아까까지 아빠랑 같이 봤어.”
그러다가도 이런 말을 들으면 아직 뺨에 남아있던 시린 온기가 사르르 녹아버린다. 입꼬리가 하늘 위로 올라간 쿠로오가 “그랬어?” 라고 말하며 에이키 볼에 제 뺨을 비볐다. 그건 싫은지 에이키가 쿠로오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쳤다. “하지마아~.” 하지만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섞여있었다.
“테츠가 붕 해서 공 파악! 했지.”
“응, 응. 서브 넣었지.”
“그거 멋있었어!”
“진짜?”
“응, 나도 나중에 그거 해보고 싶어!”
그렇게 말하면서 에이키가 쿠로오의 품에서 벗어났다. 팔짝 팔짝 뛰며 쿠로오를 흉내 내는 걸 보고 쿠로오가 “안 돼, 에이키. 아래층에서 이놈 한다.” 라고 말하면서도 내심 뿌듯했던 건 어쩔 수 없었다.
“에이키는 밥 먹었어?”
“아니, 아직. 테츠 기다렸잖아. 으휴.”
왜 늦었냐고 타박하면서 에이키는 입을 내밀었다. 사실 경기 시간을 생각하면 경기가 끝나자마자 바로 달려온 건데도 아이는 미처 거기까진 생각을 못하는 것 같았다. 아-까 아까 끝났는데. 광고하는 것도 다 보고도 한참 기다렸는데! 듣기만 해도 귀여운 투정인데 어떻게 뭐라고 하겠는가. 쿠로오는 그렇기 때문에 그 억지에도 딱히 이유를 따져서 설명하고 싶진 않았다.
“그럼 에이키가 먹고 싶은 걸로 먹을까?”
그저 제 잘못도 아닌 걸 제 잘못으로 여기고 그 틈을 타 아이가 먹고 싶은 걸로 메뉴를 정한다. 에이키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달걀 식빵….”이라고 대답했다. 그건 밥이 아니지 않아? 라고 말하려다 그냥 웃었다.
“그래, 그럼 그거 해줄게. 그거 먹자.”
쿠로오의 말에 에이키가 웃었다. 그러고는 얼른 냉장고로 뛰어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쿠로오도 가방을 내려놓고 외투를 벗었다. 그리고 의자에 걸려있는 앞치마를 이젠 자연스럽게 집어 들었다.
쿠로오와 켄마가 만난 크리스마스 이후, 쿠로오는 점심에 에이키와 만나는 걸 미루기로 했다. 이제 시합에 정말 집중해야할 때이기도 했고 일에도 집중해야 했으며 무엇보다 날이 너무 추워지고 있었다. 자면서 코를 훌쩍이는 에이키를 보고 쿠로오는 겨울에는 조심해야 한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그 대신 퇴근 이후에 에이키는 쿠로오를 제 집으로 초대했다. 물론 그래봐야 주중 혹은 시합이 두 개 잡힌 날 같을 땐 겨우 에이키와 한 두 시간 놀아주는 게 고작이었다. 그나마 오늘은 시합이 하나였고 주말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저녁도 챙겨줄 수 있었다. 그리고 에이키가 잠들면 쿠로오는 조용히 제 집으로 돌아갔다. 베이비시터네요. 완전히. 이후의 이야기를 들은 아카아시가 한 말을 부정할 순 없었지만 쿠로오는 이것만으로도 기뻤다.
“테츠, 우유!”
“오, 땡큐-.”
에이키는 얼마동안은 낯을 가리더니 곧 다시 저를 ‘테츠’라고 불러주었다. 최근에는 켄마가 없어도 쿠로오가 같이 누워주면 잠투정 않고 자기도 했다. ‘테츠도 같이 자. 맨날 눈 뜨면 테츠 없어서 슬퍼.’ 그렇게 말하는 아이에겐 미안한 마음이 늘 들었지만 쿠로오는 그래도 그 선을 넘지 않으려 노력했다. 쿠로오는 고개를 들어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켄마의 작업실은 닫혀있었다.
“아빠랑 낮에 뭐 먹었어?”
“아빠랑은 낮에…생선 먹었어.”
“그래? 맛있었어?”
고개를 끄덕이는 에이키가 어떤 생선을 먹었는지 설명해주었다. 쿠로오는 적당히 식빵을 두어 개 더 꺼냈다. “아빠는 오늘도 바빠.” 마침 그렇게 말하는 에이키에게 웃어주며 “그럼 오늘 에이키랑 같이 이거 만들어서 아빠한테도 나눠 주자.” 라고 말하자 에이키가 까르르 웃었다.
“조아! 나도 만들래!”
에이키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걸 보고 쿠로오가 슬쩍 이마를 갖다댔다. 에이키도 이마를 마주대고 마구 비볐다. “그럼 에이키가 달걀 저어줄래?” 그 말에 에이키는 얼른 손을 걷어붙였다. “손은?” 그러다가 멈칫 거리며 손을 쭉 내민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당연히 씻어야죠.” 쿠로오가 대답하며 아이를 들어 올렸다. 싱크대에 물을 틀고 손을 씻던 에이키가 웃었다.
“이걸로 손 씻어도 돼?”
이미 세 번이나 세제를 눌러놓고 그러는 거였다. 쿠로오는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고 짐짓 고심하는 표정을 짓고는 대답했다. “원래는 안 되지만 우리끼리 비밀로 하자.” 그러자 에이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이 좋아지는 나이인지라 뭔가 해도 상관없지만 굳이 하지 않으면 좋은 것을 할 때면 실실 웃으면서 돌아보곤 했다. 그런 에이키에게 슬쩍 장단을 맞춰주는 건 쉬웠다.
“자, 여기서 빙글빙글 젓는 거야.”
“응!”
“전체가 노란 색이 되면 여기 옆에 따라놓은 우유 붓고 또 빙글빙글….”
“젓는 거지?”
“응. 아이구, 똑똑하다.”
손을 씻겨주고 에이키를 그대로 식탁 의자 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계란을 풀어놓은 볼과 주걱을 같이 주었다. 옆에 일정량 따라놓은 우유를 보고 얼른 우유 붓고 싶다면서 과격한 소리를 내며 에이키는 달걀을 풀었다.
“그러다가 다 튄다, 너.”
그렇게 말하지만 에이키는 아직 아기였다. 제 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는 것도 바쁜 나이니 옷에 좀 묻어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았다. 나중에 여유로울 때 어린이용 앞치마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다가도 이젠 너무 당연하게 에이키를 생각하는 제 자신에 어색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테-츠, 이제 우유 부으면 돼?”
“어디 보자.”
나쁘지 않았다. 즐거웠다. 쿠로오가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노랗게 잘 풀어진 계란을 보고 쿠로오는 에이키를 또 한 번 칭찬했다. “우유 내가 부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아이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차분히 옆에서 기다렸다. 푹 부을 줄 알았는데 아이는 천천히 따르는 폼이 제법 그럴 듯했다.
“에이키는 누구 닮아서 이렇게 잘 하지?”
그 질문에 에이키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켄마!”
당연한 건데 웃기기도 하면서도 조금은, 아주 조금은 서운하기도 했다.
“그렇구나.”
그래서 쿠로오는 그렇게 말하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는 잠시 눈치를 보더니 “테츠~.”라고 부르며 괜히 쿠로오에게 얼굴을 비볐다. 잘 모르지만 어딘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에이키, 아직 아기네.” 그렇게 슬쩍 놀리면 또 에이키는 버럭한다. “아냐!” 그러면 우유까지 섞은 거 더 잘 저을 수 있냐는 말에 아이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집중한다. 아직 아기는 아기였다. 쿠로오는 에이키가 더 아직 아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식빵이 계란 물에 잠기는 동안 아이에게 간단히 먹일 샐러드를 위해 감자를 삶았다.
에이키가 세모꼴로 자른 식빵을 직접 계란 물에 재우고 냉장고에도 넣어두었다. 잘 스며들어야하니까 바로 먹을 수 없다는 걸 알려주고 그 동안 이걸 먹자며 감자를 으깬 샐러드를 내밀었더니 역시나 입을 비쭉 내밀었다.
“이거 먹으면 키도 크고 배구도 잘 할 텐데.”
“거짓말.”
“거짓말 아닌데. 배구 아까 봤지? 다들 키 엄청 크지?”
“…웅.”
“나보다 더 크면 나보다 배구 더 잘 할 수도 있는데.”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높이로 승부를 보는 스포츠에서 신장이라는 건 큰 무기였다. 거기다가 에이키는 또래에 비해서도 많이 길쭉하고 큰 편이니까 아마 저보다 더 클 가능성도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못해도 쿠로오 본인 정도까지는 클 것 같았다. 결국 에이키는 입을 아주 조그맣게 열었다.
쿠로오는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성공했음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에이키가 이 음식을 싫어할 리가 없다는 걸 거의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한 입 먹은 에이키의 눈이 동그래졌다. 초롱초롱 빛나는 건 형광등에 비쳐서만은 아닐 것이다. 볼이 하늘로 솟구치면서 꿀꺽, 넘기자마자
“맛있어!”
그렇게 외칠 줄 알았지. 쿠로오는 모르는 척 하며 숟가락을 넘겼다. 에이키가 얼른 받아 열심히 꼭꼭 씹어 먹었다. “체하니까 천천히 먹어.” 등을 쓸어주면서 쿠로오는 볼이 부풀곤 우물우물 움직이는 걸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이라도 보는 것 마냥 빤히 바라보았다.
날카로울 예에 귀할 귀입니다.
옛날에 들은 적 있던 에이키의 한자가 갑자기 떠올랐다. 날카로울 예-, 에 귀할 귀-. 쿠로오는 키貴만을 생각하고 그래서 이렇게 예쁜가 보다 하고 있다가 앞 글자를 식탁에 써보았다. 에이銳. 테츠鐵.
“테츠?”
“…아냐, 아냐. 괜찮아.”
귀가 빨개진 걸 애써 숨기며 테츠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꾹꾹 눌렀다. 그래도 그 말로 설명하지 못할 게 쉽게 눌러지진 않았다. 괜히 잘 먹고 있는 에이키를 꼭 안았다. “하우, 테츠, 괴로피지 마~.” 그렇게 말하는 아이가 어찌나 귀여운지 어찌나 예쁘고 어찌나 저를 쏙 빼닮고 그러면서도 누군가의 가장 소중한 귀한 아이인지.
“에이키는 어찌되었든 나보다 더 크게 되겠다!”
“응? 왜?”
왜냐면 쇠를 날카롭게 다듬은, 귀한 것이니까. 제 이름의 하나와 켄마의 이름을 생각하면 참으로도 오묘한 이름이었다. 알고 지은 거겠지. 쿠로오는 그래서 더 솟구치는 감정을 어찌할 줄 몰랐다. 그저 꼭 아이를 안을 뿐이었다.
“아아! 케엔마아! 테츠가! 나 먹던 중잉데! 자꾸 괴로펴어!”
샐러드 먹겠다고 한참 일하고 있을 제 아빠에게 이르며 숟가락을 칼처럼 휘두르는 에이키를 보고서야 쿠로오는 아이를 놓아주었다. “왜 웃어!” 괜히 성질을 부리는 에이키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쿠로오는 웃음을 지을 수 없었다. “에이키가 너무 예뻐서 그러지.” 그렇게 말하니까 “거짓말!”이라며 신경질을 냈다. “테츠, 먹는 동안 저리가!” 급기야 쿠로오를 밀어내며 식탁에서 쫓아냈다. 쿠로오는 순순히 밀려주었다.
그래도 좋았다. 이렇게 웃으면서 같이 식사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런 아이를 못 만날 뻔 했다는 걸 생각만 해도 정말 하늘이 무너질 정도로, 쿠로오는 지금이 너무 행복했다. 시합에 연말 폭탄의 일에도, 자꾸 뭔가를 알고 싶어 하는 보쿠토와 갑자기 변한 분위기에 자꾸 뭔가를 캐내려는 주변 사람들도, 이번 성과로 인해 어쩌면 올림픽 때 좋은 소식이 있을 수 있다는 감독의 은근한 말도 그 모든 게 쿠로오의 예민한 성격을 건드리지만 그래도 버틸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해줬다.
“에이키가 너무 좋아.”
쿠로오의 말에 에이키가 인상을 팍 쓰다가 결국 후 한숨을 내쉬고는 쿠로오의 품에 들어가 등을 두드려주었다. “내가아 이번 한 번만 봐주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건 어디서 배웠을까? 아마도 얏쿵이겠지. 그래도 뭐 어떤가 싶었다. 쿠로오는 키득키득 웃으며 “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한참을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놀다 시간이 늦어, 안 잔다는 아이를 안고 아이 방 침대에 눕혀주었다. 오늘은 정말 뭘 잘못 먹은 건지 한참을 이야기를 꺼내더니 결국엔 자지 않겠다고 펑펑 울었다. 눈 뜨면 테츠 없는 거 싫어. 그렇게 우는 애에게 모질게 굴 수 없어 안아주고 어르고 달래고 토닥여주다가 눈을 뜨니 낯설지만 이젠 좀 익숙해 보이는 천장이 보였다.
“헉.”
코로 마신 숨을 삼키지도 못한 채 입으로 덜컥 내뱉는데 그 순간 심장도 같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쿠로오는 얼른 폰을 확인했다. 다행히 아직 아침 7시였다. 오늘은 시합도 없었다. 단지 체육관에 가서 몸이 굳지 않도록 계속 연습할 뿐이었다. 오늘 다른 팀의 시합에서 어느 팀이 이기든 결승에서 이길 수 있도록 준비해야…아니, 그게 아니라.
쿠로오는 침대에서 뒤늦게 제 옆을 바라보았다. 에이키가 쿨쿨 자고 있었다. 어제 늦게까지 깨어있더니 그래도 푹 잘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이것도 아니었다. 쿠로오는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여기서 자면 어떡해, 이 바보야!
그렇게 자기 자신을 혼내고는 일단 고개를 털었다. 몸을 조용히 일으켜 문도 조용히 열고 닫았다. 조용히 나가자. 그렇게 생각하는데 거실의 소파와 시선이 마주쳤다. 소파 위에는 이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헉, 쿠로오는 두 번째로 심장을 내뱉었다. 켄마의 작업실은 들어가 본 적은 없었지만 슬쩍 거실에서 바라본 적은 있었다. 딱 책상 하나와 책장이 겨우 들어간 창고 같은 곳이었다. 거기는 잘 공간이 되지 않았다. 실제로도 에이키와 켄마는 같이 자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본인이 눈 뜬 장소는 에이키 침대였으니 당연히 켄마는 안에서 잘 수 없었겠지…. 안 그래도 초조하던 마음이 죄책감까지 심어져 더 무거워졌다.
“일어났네.”
그리고 뒤, 주방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쿠로오는 결국 한 번 공중으로 폴짝 뛰었다. 몸을 바르르 떨면서 뒤를 돌아보자 눈이 동그래서 저도 놀란 기색을 보이는 켄마가 있었다. 앞치마를 하고 있는 켄마였다.
“…아침…먹어?”
켄마는 아침을 먹은 스타일이 아니었다. 아니, 알고 있던 코즈메 켄마는 식사 자체를 적게 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만나지 않은 세월 동안에 바뀔 수도 있었겠지만 쿠로오는 그런 근본적인 것(?)까지 사람이 바뀔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의아하게 물어보는 쿠로오를 빤히 바라보던 켄마는 잠시 시선을 아래로 두고 대답했다.
“나 말고.”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음식이 담긴 접시를 마저 내왔다. 이미 식탁에는 1인분의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생선. 쿠로오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아침…챙겨먹었던 것 같아서.”
“어….”
쿠로오는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가슴께로 손이 올라가려다가 얼른 방향을 바꿔 어깨와 목 뒤 그 어드메를 멋쩍게 더듬으며 식탁으로 걸어갔다.
“일찍…일어났네.”
일단 인사를 먼저 건네자 싶어 한 말에 켄마는 대답을 회피했다. 켄마는 안경을 끼고 있었다. 아.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안 잤지, 너.”
“…이제 자면 돼.”
“그러다가 너 몸 상해.”
또 응급실에 실려 가려고-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만 꾹 깨문 후에 쿠로오는 얼른 젓가락을 들고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라고 말을 돌렸다. 그리고 조용히 밥을 먹었다. 쌀은 알맞게 잘 익어 고슬고슬했다. 생선은 젓가락을 가져다대니 김이 살짝 나면서 벌어졌다. 타지도 그렇다고 덜 익지도 않았다. 먹는 내내 목도 같이 막혀서 쿠로오는 중간마다 물을 마셨다. 앞에 앉은 켄마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어제 말이야.”
“아, 어제….”
쿠로오는 미안하다고 사과하려고 했다.
“고마워.”
그러나 켄마의 말에 잠시 덜컹였다.
“…요즘 에이키가 매일 떼를 쓴 건 미안해. 연말이 되면서 일정이 좀 꼬여서…. 아무래도 나한테 부리지 못하던 응석을 부리는 것 같아.”
그렇게 말하는 켄마의 표정은 조금 어두웠다. 쿠로오는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알고 있었다. “아냐, 나도 어제 피곤했던 바람에 재운다는 게 아무래도 같이 자버린 것 같아. 너야말로….” 제대로 쉬게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려던 건 꿀꺽 다시 입 안으로 삼켜버렸다. 그러나 켄마는 그 나오지 않은 말이 어떤 뜻인지 가늠한 모양이었다. 눈을 잠시 지그시 감았다 뜨는 행동이 조금은 피곤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결승…축하해.”
“응.”
쿠로오는 고개를 숙이며 괜히 밥을 먹었다. 그래도 귀 끝이 빨간 건 켄마에게 숨기질 못했다. 켄마는 그걸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마지막에 됐다 싶을 때 자꾸 한 발 먼저 들어가려고 하는 거 자제해.”
“…응?”
“차라리 멈칫하지 말고 달려서 속공을 하란 뜻이야. 발은 먼저 들어갔는데 몸은 굳어있으니까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원하던 방향으로 안 가는 거야.”
아니면 아예 됐다 하고 숨을 한 번 고르고 안정적으로 들어가거나.
쿠로오는 눈을 깜빡였다. 확실히 요즘 됐다 싶으면 저도 모르게 시간차 공격을 할 때처럼 몸을 멈추는 버릇이 생겼다. 발은 먼저 움직이려고 하고 머리는 안정적으로 들어가자고 하고. 어제 경기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간파 당하다니. 쿠로오는 제 앞에 앉은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코즈메 켄마’라는 걸 다른 의미로 다시 실감했다.
“그리고 손목이 아픈 건 병원을 가 봐.”
“…어?”
“…예전에 잠깐 부상 입은 적 있잖아. 그게 처음엔 괜찮았을지 몰라도….”
그렇게 말하다가 켄마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숨만 골랐다. “운동선수에겐 사소한 것도 다 부담이 되니까…하는 소리야.” 그렇게 말하며 켄마는 반짝이는 폰을 확인했다. 잠깐 부상…. 쿠로오는 작년 이맘때에 잠시 공을 잘못 받았던 적을 떠올렸다. 정말 잠시였고 부상이라고 할 것도 아니었다. 팔이 부러진 것도 근육이 놀란 것도 아니었고 말 그대로 잘못 받아서 강타를 그대로 맞았던 거였다. 잠시는 욱신거렸지만 원래 그렇듯 잠시 후에는 괜찮았다. 운동한 세월과 경험을 따져봤을 때 그 일로 부상이 남았을 리는 절대 없었다. 쿠로오는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쿠로오는 괜히 손목을 삐거덕거리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멍하니 제 손목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사소해서 부상의 축에도 끼지 못하는 거였고, 그건…당연하게도 신문이나 심지어 방송 중 앵커의 언급도 없었을 정도였다. 이 사실을 그런데 켄마는 콕 집어냈다. 어디에도 실리지 않은 내용을 알고 있다는 건…. 쿠로오는 이젠 못 참을 것 같았다. 괜히 눈 끝이 간질간질했다.
“…조심할게.”
쿠로오는 결국 눈가에 아주 작은 투명한 진주를 달았다. 켄마가 티슈를 건넸다. 아하하, 쿠로오는 괜히 웃고는 건네준 티슈로 눈가를 톡톡 찍었다. 나이가 들면 감정기복이 심해진다는 건 아무래도 틀린 말 같았다. 감정기복이 심해지는 게 아니라 더 이상 숨기질 못하는 걸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밤늦게 다시 집에 돌아가지 말고….”
어딘가 주저하는 목소리로 켄마가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눈가를 톡톡 찍고 있던 쿠로오가 여전히 티슈를 눈가에 붙인 채로 바라보았다. 그런 쿠로오를 슬쩍 피해 고개를 돌린 켄마의 귀는 아쉽게도 머리카락에 가려져있었다. “가끔이라도 괜찮으니까….” 라고 말하면서 점점 고개가 숙여졌다.
“자고…가도 되니까.”
에이키도…가끔 보고 가고…, 덜 바빠지면…. 점점 말끝이 웅얼웅얼 뭉개졌다. 그런데 그만큼 쿠로오의 눈과 귀가 활짝 열렸다. 티슈가 쿠로오의 손에서 구겨졌다. 감정에 따라 쿠로오의 어깨가 쭉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쿠로오의 입가도 하늘로 올라가고 눈가는 둥글게 휘었다.
“응. 자주 올게.”
“…응.”
비록 눈은 마주치지 않았지만 켄마의 끄덕임에 쿠로오는 잠도 다 달아나고 지금 바로 서브 10번, 블로킹 10번, 스파이크 20번 리시브 50번을 연달아서 해도 다 하고도 기운이 남을 것 같았다. “…아빠아.” 떠드는 소리에 깬 모양인지 에이키가 문을 열고 나왔다가 쿠로오를 보고 “테츠으~.” 부르며 얼른 달려와 다리에 매달렸다.
“에이키 보고 가려고.”
“후흐, 테츠 그럼 이제 또 나가? 배구해?”
“응, 오늘은 연습. 연습하고 또 올게.”
“응-, 테츠, 그럼 오늘도 자고 가?”
오늘도 자고 가면 좋겠다. 에이키가 괜히 비비고 예쁘게 눈을 뜨고 초롱초롱 바라보았다. 그 순간 집에 있는 셔츠들이 생각났다. 셔츠들을 몇 개 챙겨올까? 그럼 여기서 바로 옷 갈아입고 출근하면 오히려 집에서 출발할 때보단 더 늦게 나와도 되는데. 허락을 받은 지 몇 분이 되었다고 쿠로오는 벌써부터 제 짐을 여기다 옮겨놓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품하는 아이를 내려놓고 시간을 확인한 후 쿠로오는 얼른 나갈 준비를 했다. 신발장에서 운동화 앞코를 툭툭 치자 에이키와 켄마가 현관까지 나왔다.
“다녀올게.”
그 인사에 켄마가 고개를 슬쩍 숙이고 마주 인사해주었다.
“다녀와…. 쿠로.”
그 인사는 그 때 한번 뿐이었지만 쿠로오는 이제 신발을 신고 버릇처럼 앞코를 툭툭 땅에 칠 때면 늘 그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가 사라졌다. 뿐만 아니었다. 공이 떠오르는 걸 눈으로 쫓으면서 순간 ‘아, 이거라면-.’라는 순간에도 쿠로오는 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더 날카로워지고 신중해진 쿠로오의 움직임에 결승을 앞두고, 카게야마는 쿠로오를 불렀다.
“혹시 코즈메 씨와 만난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따로 나를 불렀구만. 나름 눈치를 본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고 쿠로오는 왜 그가 그렇게 물어보는지를 잘 몰라서 고개를 기울이기만 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어?”
“움직임과 신중함이 어딘가 옛날 느낌이 나서요.”
“옛날 느낌?”
“코즈메 씨를 믿고 행동하는 부분이요.”
쿠로오는 가만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풋 웃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대학 때부터는 혼자만 배구니까 다 같이 하더라도 더 이상 누군가를 절대적으로 믿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어쨌든 내가 잘 해야 해-. 라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니까. 세터를 믿고 뒤를 받쳐준다는 건 벌써 몇 년 전의 이야기이긴 했다. 그런데 그 옛날 버릇이 켄마의 한 번의 조언으로 다시 나타났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서 많이 불편해?”
“아뇨. 오히려 움직임이 더 편해졌습니다.”
“그럼 앞으로는 이렇게 가는 걸로?”
“네, 알겠습니다.”
그러다가 카게야마가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흐음, 쿠로오는 모른 척하며 “그럼 이야기는 다 끝났지?”라고 물어보았다. 스포츠 타올로 이마에 땀을 닦으며 이제 돌아가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치자 카게야마는 버벅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쿠로오는 그 날엔 그런 방법으로 도망쳤다.
보쿠토에게도 말하지 못했는데 카게야마에게까지 퍼트리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은 조심스러운 게 많았다. 켄마에게는 허락을 받았다고 하나 그래봤자 이제 겨우 자고 가는 것 정도였다. (심지어 건전하고 불가피한 이유에서의 제한적 인정이다) 거기다 어쨌든 계속 세간에 주목을 받고 있는 건 쿠로오였다. 그런 쿠로오의 경솔한 말 한 마디에 일반인 켄마와 에이키가 힘들어지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켄마가 쿠로오의 커리어를 걱정하는 것만큼 쿠로오도 둘의 행복을 셋이서 누리고 싶다고 해서 그 조용하던 행복을 왁자지껄하게 만들고는 싶지 않았다.
일단, 이번 리그 우승 하고 나서.
이상하지, 분명 리그 우승을 꿈꿨던 건 켄마를 만나고 싶어서였는데 보고 난 후에 오히려 쿠로오는 더 우승하고 싶었다. 우승을 해서 꼭 거창한 걸 하고 싶은 건 없었다. 켄마의 손을 잡고 웃고 싶었다. 이상하게 그러면 켄마가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줄 것 같았다. 망상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비록 경기장에는 오지 않겠지만.
정확히는 말하기도 전에 못 오는 상황을 알게 되었다. 그 날 계약하고 있는 회사에 찾아가봐야 해서 에이키를 낮 동안은 아카아시가 봐줄 거라고 말해줬었다. 내가 데리고 있어도 된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인지라 쿠로오는 고개만 끄덕였다. 아, 아쉽다. 그 말이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왔다. 고개를 휘휘 저었지만 그래도 역시 쩝, 소리가 났다. 그래도 요즘은 재방송이 있으니까. 아예 보지 않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에 쿠로오는 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잘 해야 해. 멋있는 모습 보여주자.
두 뺨에 손을 올린 채로 다시 숨을 마시고 훅, 내뱉었다. 눈은 상대방을 꿰뚫어보려는 고양이의 매서운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입 끝이 살짝 올라간 모습은 고양이의 여유로운 미소와 닮았다. 좋아, 가자.
가서 우승컵을 가져오자.
멤버를 부르는 감독의 목소리에 따라 쿠로오는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함성과 사람들 사이에서 쿠로오는 결승에서 드디어 스타팅 멤버가 되었다.
“저 사람이 테츠지요?”
에이키가 손가락을 뻗어서 사람을 가리켰다.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가르쳤지만 이번은 예외로 두기로 하고, 아카아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깝지 않은 자리였지만 아이는 어떻게든 제가 아는 사람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이 바로 쿠로오였다.
“에이키는 어느 쪽이 이겼으면 좋겠어?”
당연한 질문을 하며 아카아시는 에이키의 허리를 잡고 들어 제 옆에 다시 앉혔다. “테츠!” 에이키가 즉각 대답하고 칭얼거렸다. “여기 앉으면 잘 안 보여.” 에이키 입장에선 그럴 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난간에 매달리게 하는 것도 안 되는 거라 아카아시는 “저기 매달리면 떨어져서 병원 가야 해.”라고 말해주면서도 슬쩍 앞에 빈 VIP석을 바라보았다.
“쩌어-기 사람 없는데 저기 가서 앉으면 안 돼?”
그리고 그걸 아이도 발견한 모양이었다. “거기는 미리 약속하고 앉는 곳이라 안 돼.” 그 때였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 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갑자기 나는 큰 소리에 조금 겁을 먹은 모양인지 아카아시의 코트를 잡았다. 쾅! 공을 내려치는 소리에도 슬쩍 아카아시에게 붙었다. 아카아시는 확실히 경기장의 소음은 아이들에겐 무서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에이키를 토닥여주며 아카아시가 마침 화면에 잡힌 사람을 보여주었다. “저 사람 누구야?” 그 질문에 에이키가 “쇼-씨!” 라고 대답했다.
“그럼 저 사람은?”
그리고 그 질문에는 에이키가 눈을 반짝였다.
“테츠!”
벌떡 일어나서 큰 소리로 외치는 바람에 아카아시는 키득키득 웃으며 아이를 다시 앉혔다. “그래됴 역시 무서워. 너무 시꾸러요.” 에이키는 입을 내밀고 후드 밖에서 귀가 있는 곳을 꾹 눌렀다. 그러다가도 아이는 곧 공을 눈으로 쫓았다. 후드의 털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카아시는 그 눈을 잘 알고 있었다. 네코마…끼리의 피는 저렇게 되는 걸까? 마치 사냥감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바짝 세운 눈은 두 사람을 쏙 빼닮은 눈이었다.
“공 떨어졌어!”
“그럼 떨어뜨린 사람이 지는 거야.”
“우응. 저 사람 넘어졌어.”
“그러게, 아프겠네.”
아, 다시 일어났다. 아이는 배구라는 것에 대해서 드디어 배워가고 있었다. 정확히는 공을 주고받기만 하는 게 배구가 아니라는 걸 몸소 깨달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경기가 진행될수록 에이키는 점점 손을 내렸다. 아카아시의 소매를 잡다가도 곧 놓았다. 아직 어려서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아 가끔은 아카아시를 당겨 과자 먹고 싶다거나 켄마는 언제 오냐고 하거나 목마르다고 하곤 했지만 그래도 또 공을 세게 때리는 소리가 나면 고개를 다시 돌렸다. “에이키는 배구 재밌어?” 아카아시가 물어보았다.
“으음…. 잘 모르겠어.”
“그렇구나.”
재밌다고 할 줄 알았는데 진지하게 뭔가를 생각하는 에이키에게 차마 뭐라고 말하지 못한 채 아카아시는 그냥 그대로 받아들였다.
“나도 저기서 해보면 알 수 있을 거 같아.”
그러다가 에이키의 말에 잠시 누군가가 떠올랐다. 마침 그 누군가가 스파이크를 성공했다. 주먹을 쥐고 두 손을 들어 올리며 함성을 지르는 사람을 보며 아카아시는 에이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기서 해보려면 에이키 배구 엄청 잘해야 할 텐데.” 그렇게 말하자 에이키가 웃었다.
“그럼 테츠는 엄청 잘하는 거예요?”
“음…. 그렇지요.”
“그럼 테츠를 이기려면 내가 더 더 잘해야 하는 거죠?”
“에이키 라이벌은 쿠로오 씨야?”
“라이벌?”
“꼭 이기고 싶은 사람.”
“으음…. 그런가?”
에이키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꼭’ 까지는 아닌 모양이었다. 아들이 라이벌로 세우는 사람이 아버지라니. 그건 또 어떤 기분일까. 아카아시는 가끔 에이키를 보고 있으면 저에게도 아이가 있으면 어떤 느낌일지 상상하곤 했다. 그래서 이 둘이 꼭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와! 이번엔 누가 이겼어?”
“이번엔 저쪽이 이겼어.”
“에잉….”
너무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아이의 표정은 실망 그 자체라서 아카아시는 아이를 들었다. 확실히 결승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상대도 만만찮은 팀이었다. 계속 세트를 주고받으며 어느덧 마지막 세트만을 남겨두었다. 5세트를 위해 광고를 하고 코트를 정리하는 사이에 미리 화장실을 다녀오자고 아이의 손을 잡고 나가는 아카아시를, 멀리서 보쿠토가 본 모양이었다.
“아카아시!”
화장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카아시를 쫓아와 빙그레 웃는 보쿠토 때문에 아카아시는 심장이 떨어져나가는 줄 알았다. “깜짝 놀랐잖아요.” 그 말에 화장실 주변을 오가던 사람들이 잠시 지켜보다가 벗어났다. 보쿠토 코타로 덕분에 보쿠토의 고등학교 후배, 아카아시도 제법 팬들 사이에선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보쿠토는 인사가 끝난 후 바로 눈썹을 내리고 아쉽다는 듯이 아카아시에게 말을 덧붙였다.
“미리 말하지. 그랬으면 앞자리 구했을 텐데.”
“저도 갑자기 온 거라 미리 말씀 못 드렸어요.”
“누구랑 같이 온 거야?”
아, 맞다. 보쿠토 씨, 알고 계신가? 아카아시는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보쿠토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카아시….” 대답을 못하는 아카아시를 질책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춘 보쿠토는
“아카-아시 씨, 손 씻었어요.”
젖은 손을 강시처럼 들고 나오는 아이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멍하니 바라보던 보쿠토가 점점 고개를 숙이고 아이의 후드를 뒤집었다. 에이키가 놀란 게 보여서 아카아시는 얼른 “에이키.”라고 말하며 에이키의 후드를 씌워주고 제 등 뒤로 아이를 숨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보쿠토는 후드 안에 있던 아이의 얼굴을 보고 경악했다가 인상을 팍 쓰며 화가 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누구 애야.”
“…이미 누구 애인지 알고 있으면서 묻는 건가요?”
그렇게 말하고 아카아시는 한숨을 쉬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굽히고 에이키의 시선에 제 몸을 맞췄다. “에이키, 아까 봤던 사람, 기억나요?” 에이키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아카아시의 말에 고개를 들어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아는 사람이기도 한데…, 에이키, 인사할래?”
“싫어, 무서워….”
“아냐, 에이키가 누군가 싶어서 본 거니까. 에이키, 용감하지?”
아카아시가 다독이고 은근히 아이의 자존심을 건드리면서 억지로 보쿠토 앞에 세우고 인사를 시켰다. 에이키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울먹거리면서 작게 제 이름을 이야기 했다. 코…즈메…에-키….
“코즈메….”
그리고 그 이름을 듣고 나서야 보쿠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렇게 된 거구나. 이제야 얼추 알겠다는 듯이 뒷목을 긁적이던 보쿠토는 얼른 쪼그려 앉아 에이키와 눈높이를 맞췄다.
“미안해, 방금 놀라게 했지. 용서해줄 수 있어?”
빠르고 진심이 담긴 사과에 에이키는 고개를 끄덕이곤 얼른 아카아시 뒤로 숨었다. “쿠로오는 알아?” 그 말에 아카아시는 대답했다. “코즈메와 에이키와는 알고 있고 자주 만나고 있어요. 그리고 여기에 온 건 말씀 못 드렸어요.” 애매한 질문에 정확한 답을 건네주자 보쿠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는 가서 말해줄게.”
어쩐지 요즘 기합이 들어갔더니만 이런 거 때문이었구만. 보쿠토는 툭툭 제 몸을 털고 일어나더니 입을 비쭉 내밀었다. “그런데 코즈메는?” 그렇게 물어보기에 아카아시가 또 대답했다. “오늘 회사에 계약 건으로…. 낮 동안 돌봐주기로 했어요. 일찍 끝나면 온다고는 했습니다.” 그렇구나. 그 대답에도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가보세요. 선수가 이렇게 여기서 밍기적거리면 안 됩니다.” 아카아시가 잔소리를 하자 보쿠토가 투덜거렸다.
“안녕, 다음엔 아이스크림 사줄게.”
“…….”
나름 친해지겠다고 한 인사였지만 에이키는 뒤로 숨기만 했다. 작별 인사를 하고 보쿠토는 어딘가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돌아갔다. 으이그, 저 사람. 아카아시는 이마를 잠깐 짚고 다시 에이키 앞에 손을 내밀었다. 에이키의 손은 아까 아카아시의 코트를 계속 붙잡고 있어서 이젠 뽀송뽀송했다.
“쿠-로오.”
“넌 또 어딜 다녀왔냐?”
조금 있으면 마지막 세트가 시작될 거였다. 화장실 다녀온다며 나가던 녀석이 아슬아슬하게 들어온 걸 보고 잠깐 잔소리를 내뱉으려던 쿠로오는 보쿠토의 갑작스러운 어깨동무에 영문 모를 한숨만 내뱉었다.
“저-기 보여?”
“또 뭐가 그리 불만….”
어깨동무를 한 채로 어딘가를 질질 끌고 가더니 가리키는 건 관객석 2층 어딘가였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건 좀 고쳐졌다고 생각했더니만 다시 또 뭔 심술로 그러나 싶어서 고개를 들어 보쿠토가 가리키는 곳을 올려보다가 쿠로오는 입을 다물었다. 에이키였다. 팔짝 뛰며 에이키가 두 손을 흔들었다. 옆에는…켄마가 아니라 아카아시가 행여나 떨어질까 싶어 얼른 아이를 앉히고 있었다. 말을 잃어버린 제 친구를 보고 보쿠토는 어깨동무를 풀고 등을 팍, 힘껏 때렸다. “악!” 쿠로오는 소리를 질렀다.
“잘해라.”
그리고 보쿠토의 진심어린 응원에 어이가 없다가도 웃음이 나왔다. 아까 아카아시를 만나고 오면서 에이키를 본 모양이었다. 묻고 싶은 것도 많고 놀랐을 게 뻔한데도 보쿠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번 시합에 집중하자는 말만 건네는 친구에게 쿠로오는 나중에 밥이라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진심이었다. “너도 잘해라. 에이스.” 쿠로오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두드리자 보쿠토가 다시 기운을 차리고 씨익 웃었다.
마지막 세트의 시작을 알리는 휘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인사 후 켄마는 서류를 챙겨 가방에 넣고 몸을 일으켰다. 악수를 건네는 상대방에게 손을 마주잡았다. “이제 어디 가시나요?” 그 질문에 켄마는 가만히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니, 저도 잠시 나가는 길이라서 같은 방향이면….” 그렇게 말하는 상대방에게 “아….”라고 수긍했다.
“○○체육관으로 갑니다.”
“아…, 약속이 있으신 건가요?”
“네, 늦게라도 가겠다고 말해서요.”
상대방은 알겠다며 주차장으로 켄마를 안내했다. 완전히 같은 방향은 아니지만 급한 건 아니라며 거기 입구 근처까진 가능할 것 같다는 말에 켄마는 두 말 않고 차에 올라탔다. 늦게라도 가겠다고 했지만 기왕 가는 거 빨리 가고 싶었다. 회사 직원이 잠시 뭐라고 말을 붙여보았지만 곧 오래가진 않았다. 켄마는 차창 밖을 내다보다가 인터넷으로 뭘 검색했다. 2:2. 그럼 조금 있으면 마지막 세트를 시작하겠구나. 이상하게 그걸 알자마자 켄마는 갑자기 초조해졌다. 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배구라는 건 제게 있어서 떼어 내고 싶어도 떼어 낼 수 없는…, 깨끗하지만은 않은 추억이고 기억들이었다. 아주 멀어질 수는 없지만 그래도 현장은…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때도 이 결심이 그렇게 오래갈 거라는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자신은 쿠로오를 좋아하고, 쿠로오는 계속 배구를 할 사람이었으니까. 그냥 마음이 그랬다는 거였다. 그리고 생각보다 그 기간이 길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했어도 결국 켄마는 이렇게 다른 사람의 호의에 빌붙어 체육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치 예전 전국 대회에 갔던 그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담담하지만 그러면서도 자꾸 가슴 언저리에서 간지러웠던.
차에서 내려서 걸어서 들어갔다. 2층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결승, 거기에 마지막 세트였기 때문인지 사람이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사람을 헤치면서 들어가기는 어려워보였다. 방송으로 볼 때는 그렇게 사람이 많아보이진 않더니 막상 들어오니 사람들의 함성 소리와 경기장 특유의 끼긱거리는 소리에 귀가 다 아플 정도였다. 에이키는 괜찮으려나. 소리에 예민해서 조금만 큰 소리가 나도 꼬리를 펑 터트린 고양이마냥 펄쩍 뛰곤 했는데.
“…….”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화면에 가득 쿠로오의 얼굴이 담겼다. 원터치! 외치자마자 쿠로오는 다음 동작을 준비했다. 당연히 공이 떨어지지 않고 올라올 거란 믿음이 있어야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역시나 공이 올라오고 카게야마가 손을 모았다. 켄마는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서 괜히 주먹을 꼭 쥐었다. 히나타가 날고 보쿠토가 도약하고 있었다. 쿠로오는…. 무릎을 굽히고 있었다. 시간차공격. 전방에 블로킹 셋. 둘은 보쿠토를 견제하고 있었고 하나는 히나타와 동시에 뛰었다. 켄마는 순간적으로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선택하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토스를 받은 건 가장 이상적인 선택지, 쿠로오 테츠로였다.
그리고 동시에 켄마는 저도 모르게 슬쩍 웃었다.
“방금의 득점으로 먼저 매치 포인트에 올라갔습니다!”
앵커의 소리에 켄마는 후, 하고 한숨을 괜히 내쉬었다. 반만 묶은 머리 꽁지를 만져보고 집에서 급히 나온다고 쓰고 나왔던 안경 가운데를 건드려 슬쩍 올렸다 내렸다. 저기에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선수들이 입으로 호흡하는 걸 보며 켄마도 따라 입으로 숨을 쉬었다.
조금은 미련이 있었을지도.
켄마는 거기서 제 옛날 생각을 정정했다. 사랑과 동경으로 시작해서 아주, 많이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싫어했던 건 아니었다. 조금은 더 해보고 싶었을 수도…. 물론 그 ‘더’에는 제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전제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배구 그 자체를 싫어하진 않았다. 쿠로오가 웃으며, 땀을 흘리며 팀원과 말하고 있었다. 서로 수신호를 주고받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앞의 상대팀을 바라본다. 웃음은 지우고 시합에 집중하는 쿠로오의 눈은 고양이보다는 정말 흑표범 같은 맹수의 눈이었다. 켄마는 난간에 손을 짚고 슬쩍 기댔다. 저 눈을 좋아했다. 저 분위기를 좋아했다.
저 열정을 좋아했다. 그래서 쫓아가고 싶었지.
공이 다시 공중에 뜨고 강하게 내려쳐져서 상대편으로 날아간다. 켄마는 거기에 서서 시합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배구 자체에 집중하는 날이었다. 눈은 가만히 공을 쫓고 주변을 살피며 전략을 파악하고 어떻게 전략을 세울지 어느 쪽을 선택할지를 정하며 올라오는 공에 손을 뻗는 그 순간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자꾸 펴지는 손을 마주 모아 켄마는 잠시 눈을 감았다. 사람들의 함성 소리와 앵커와 해설의 큰 소리에도 켄마는 고요하게 제 손 끝의 떨림을 느꼈다.
“쿠로오, 인터뷰 하고 싶다는데!”
보쿠토가 아주 들뜬 눈으로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자꾸 핏 핏 웃으며 제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툭 쳤다. 이러니까 더 알려주고 싶지도 않고 밥 산다고 생각했던 것도 전언 취소하고 싶어졌다. 아주 놀려라, 놀려. 쿠로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저를 기다리는 기자단에게 걸어갔다. 으와, 최근 성적이 그리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던 터라 쿠로오에게 있어서도 이런 인터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안녕하심까. 고개를 꾸벅 숙이고 들어가자 기자단들도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서로가 모두 어색한 순간이었다.
그래도 쿠로오 테츠로는 원래 말을 잘 하던 사람이었다. 처음에나 어색하지, 오랜만의 인터뷰에도 능청스럽고 능글맞고 능숙하게 해냈다. 유연하게 피해갈 질문엔 피해갔다. 그렇게 말하면서 쿠로오는 제 앞의 관중석을 잠시 눈으로 살폈다. 에이키는 어디 있으려나. 아마 사람들 때문이라도 바로 나가진 않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느긋하게 아카아시와 에이키를 찾아 훑던 쿠로오는 잠시 우뚝 멈췄다. 에이키가 팔을 벌려 한 사람에게 안겼다. 검은 머리를 반으로 묶고 안경을 쓰고, 에이키와 다른 색의 아우터를 입고 있는 사람. 코즈메 켄마였다. 보러왔다. 못 보러온다고 했던 사람이었다.
“쿠로오 씨는 내년의 목표가 있으신가요?”
“늘 그렇듯 예전의 저보다 더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하하, 내가 진짜 켄마를 좋아하는가보다. 쿠로오는 인터뷰를 하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이 경기가 끝나고 이제 식어가는 몸에 다시 온도를 높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대학 시합 때도 그랬던 것 같았다. 아, 아니, 처음 미야기에 갔을 때도 그랬지. 늘 켄마만큼은 잃어버린 것 같다가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어코 찾아냈지. 쿠로오는 예전 기억을 들추며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무의식적으로 둥글어진 쿠로오의 인상에 몇 기자단은 카메라를 들었다. “이번보다 좀 더 성장하고, 그리고 더 완성된 선수의 모습을 응원해주시는 모든 분께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런 게 다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거였는데. 쿠로오는 말은 하지 못하고 조용히 행동으로 맴돌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그리고 최근, 겨우 한 발을 뻗은 저를 떠올렸다.
“…그리고….”
같이 헤매고 있던 켄마의 손을 잡고 켄마의 선을 넘어 같이 있고 싶었다.
“개인적으로는 이제 혼자가 아니라 같이 가족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 지 깨달았을 땐 이미 마음의 소리가 말로 변환되어 나온 후 였다. 아차, 싶었지만 곧 뭐, 어때가 되었다. 이상하게 겁나지 않았다. 방금 경기를 끝나고 와서 생겨버린 형편없는 자신감 때문일지도. 기자들의 눈은 동그래지고 쿠로오-!라고 작게 저를 급히 부르는 감독과 팀 매니저와 보쿠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쿠로오는 관객석을 바라보았다. 저를 내려다보는 켄마를 보았다.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표정일지 알 것 같았다. 적어도 웃고는 있지 않을 거다. 아마 집에 가면 무슨 말을 한 거냐며 오랜만에 엄청 혼날 거다. 당황해서 붉어진 얼굴이거나 못 들을 걸 들었다는 것처럼 잔뜩 인상 쓰고 경멸하는 얼굴이겠지.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쿠로오는 입가가 둥글어졌다. 그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관객석으로 손키스를 날려버리고 싶었지만 그건 꾹 참았다. 쿠로오 테츠로는 굳이 화난 사람을 더 건드려서 제 벌을 늘리는 선택지를 바보 같이 택하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미쳤어?”
역시나 집에 가자마자 들은 첫 대사는 날카로운 비수였다. 쿠로오는 일주일만에 찾아온 켄마의 작은 집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오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구요. 그렇게 변명하자마자 쿠로오 앞에 아주 정확하게 신문이 떨어졌다. 와, 배구 안 한 줄 알았더니 어째 더 토스가 정확해진 것 같아. 그런 농담은 죽어도 입 밖에 못 꺼냈다.
쿠로오 테츠로, 가족이 되고 싶다.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얘네 참 기자면서 워딩을 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서늘한 눈빛을 보고 쿠로오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뭐, 그럴 수도 있죠. 제가 말꼬리를 제공해준 게 잘못이죠. 네…. 쿠로오는 가만히 다시 신문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떡할래.”
“역시 가족이 되는 게…죄송합니다. 농담입니다.”
서늘하다 못해 죽을 것 같은 눈 때문에 쿠로오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뭐에 그렇게 신난 건지 모르겠지만 켄마는 한숨을 푹 쉬었다. “진지하게 묻는 거야.” 그 목소리는 지쳐 보이고 한없이 낮았다. 쿠로오는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꿔보려던 시도를 깔끔하게 접기로 했다. 큰 숨을 입 대신 코로 한 번 내쉬고 고개를 들었다. 진지한 얼굴로 쿠로오는 켄마를 바라보았다. 켄마도 그런 쿠로오를 내려다보았다. 켄마 눈 밑이 검기만 했다.
“기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네가 한 말에 집중하고 있어.”
실제로 그 인터뷰 후에 그대로 끌려가선 팀 매니저에게도 혼나고 감독에게도 혼났다. 혹시나 싶어서 요 근래 일주일 동안은 켄마의 집은커녕 회사 집만 왔다 갔다 했다. 가끔 눈에 익은 사람이 보이기도 했지만 정말 착실한 회사원 모습을 보여주자 거의 다 떨어져나갔다. 물론 회사 측에서도 대처를 했다. 이제 나이가 있다 보니 가족을 꾸리는 것에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라고 둘러댄 것이 애매하게 말한 쿠로오의 발언과 얼추 맞아떨어지긴 했다.
“너, 그냥 일반인 아냐. 스포츠 기사에 네 얼굴이 나오는 건 이제 당연해.”
“…네가 걱정하는 건 잘 알아.”
쿠로오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켄마가 걱정하는 건 제 커리어였다. 가십 하나에 사람 하나가 매장되는 것도 흔한 게 바로 스포츠와 연예계였다. 특히나 날이 가면 갈수록 스포츠와 연예계는 자꾸 하나가 되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이라는 건 소문에 약하기 마련이었다. 누가 뭘 어쨌더라는 소문만 퍼져도 다들 그 소문의 진상을 아는 것보다 욕하거나 품평하는 게 먼저였다. 켄마의 얼굴이 어두운 건 아마 쿠로오 테츠로를 걱정해서 생긴 거겠지. 쿠로오는 그래서 뒤이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게 뭐?”
그 말에 켄마가 화들짝 고개를 들고 정말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냐는 표정을 하고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쿠로.” 오랜만에 듣는 켄마의 ‘쿠로’라는 말은 듣고 싶던 것과 정반대의 뜻으로 발화되었다.
“나는 너와 에이키, 둘 다에게 나도 가족이라고 인정받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 많이 늦었지만 늦은 만큼 열심히 할 거야. 그게 이상해?”
“그런 게 아니잖아.”
“알아. 네 말이 뭔지. 속되게 표현하면, 이런 내 마음을 너무 대놓고 표현하면 내 ‘앞길’ 망친다는 거잖아. 그런데 그런 걸로 내 앞길이 망쳐진다면 그럼 난 더 안 하고 싶어.”
“쿠로!”
“나는 이때까지 너와 배구는 같이 양립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켄마는 그 말에 뭐라고 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쿠로오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배구도 좋아하고 너도 좋아해. 그게 꼭 어느 한 쪽을 택해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렇잖아. 그리고 배구를 하면서 너를 떠올리기도 하고, 너를 보고 있으면 옛날 우리가 같이 했던 배구를 떠올리기도 해. 그래서 나는 둘은 같이 좋아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쿠로오는 고개를 들어서 켄마를 바라보았다. 눈썹은 내려갔지만 쿠로오의 눈빛은 또렷했다. 이렇게 일이 되어서 안타깝지만, 쿠로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켄마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하지만 더 이상 양립할 수 없다면 당연히 나는 널 택할래. 널 좋아하니까.”
켄마가 잠시 ‘이 바보….’라고 말할 것 같은 표정을 짓다가 후으-. 하고 바람 빠진 풍선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이마에 제 손을 올렸다. 서 있을 기운도 없는 모양인지 주르륵 의자에 기대서 흐르는 모습에 쿠로오가 당황해서 얼른 켄마 근처로 가 안절부절 못했다. 켄마만 걱정하는 얼굴이 참 바보 같고 그러면서도 배짱 두둑해서 그냥 저 혼자 오만 걱정을 다 한 게 부끄러워져서 할 말이 없었다. 계속 망설이던 쿠로오에게 켄마가 말했다. “하고 싶은 거 해도 돼.” 그 말이 끝나자마자 쿠로오는 켄마를 어설프게 감쌌다.
말을 하는 줄 알았더니 갑자기 이렇게 안아주는 것에 놀라 켄마가 가만히 있었더니 잠시 후에 쿠로오가 켄마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토닥이며 쿠로오가 말을 이었다. 네가 많이 힘들 거라는 것도 알아. 생각 많이 했어. 하지만 그래도 역시 나는 이제 이런 저런 핑계 대면서 멀어지고 싶지 않아. 조곤조곤 말해주는 목소리에는 조심스럽고 신중한 기색이 듬뿍 묻어있었다. 켄마는 눈을 감고 쿠로오 어깨에 제 턱을 올려두었다. 눈을 감고 켄마가 말했다.
“나는 너 먹여 살릴 정도로 벌지는 않아….”
“괜찮아. 나 요 몇 년간 정말 돈 쓸 곳이 없어서 모아두었어.”
적어도 1년 정도는 백수로 있어도 괜찮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것마저도 정말 계산을 다 해보고 온 것 같아서 켄마는 풋 웃었다. 켄마의 희미한 웃음소리가 쿠로오 귓가에 터졌다. 그래서 쿠로오도 따라 웃었다.
“실력 좋은 배구선수를 백수로 만들어버리면 나 혼나는 거 아냐?”
“누구에게? 내가 아는 사람은 널 혼낼 사람이 없는데?”
“…쿠로 팬이라거나.”
“내 팬이면 내 행복을 먼저 해줘야지. 너에게 고맙다고 절해도 모자랄걸.”
“무슨 소리야 그건.”
“이렇게 예쁘고 귀엽고 잘생기고 박력 넘치고 멋있는 사람이 켄마라니!”
“전혀 아냐.”
“맞아.”
“뭐라는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켄마는 키득키득 웃었다. 쿠로오는 얼른 그 소리에 켄마를 번쩍 들고 일어났다. 켄마가 놀라서 쿠로오의 목 뒤에 얼른 제 팔을 감았다. 등 뒤를 꽉 붙잡는 손힘을 느끼면서 쿠로오는 묘한 장난기가 발동했지만 조용히 소파에 켄마를 내려주었다.
“그러니까 걱정 마.”
“…그건 조금 무리.”
“뭐, 그리고 갑자기 성이 바뀌기 전에 미리 이런 떡밥은 있어야….”
“성?”
“…응.”
“누가?”
“내가.”
“뭘…로?”
“뭐긴 뭐야, 코즈메…지?”
쿠로오의 말에 켄마의 털이 바짝 곤두섰다.
“왜 쿠로가 코즈메야?”
“뭐야, 그럼 나 계속 혼자만 쿠로오로 살아?”
“아니, 그 전에 벌써 혼자서 거기까지 진도를 나간 거야?”
“아니, 가족이 된다는 건 법적인 것도 고려를 해야 하잖아?”
쿠로오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켄마의 말대로 혼자서 거기까지 고려한 건 좀 지나친 감이 있었다. 둘 다 멍하니 상대방을 보다가 조용히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한숨을 내뱉었다.
“그렇게 빨리 먼 곳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말해놓고 보니 부끄러우니까 제발 잊어줘.”
쿠로오는 제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쿠로, 그렇게 막나가는 성격인줄 몰랐는데.”
“뭐…. 코즈메 켄마와 어울린 세월이 있다 보니 그만 배웠나보지.”
그게 무슨 말이야. 켄마의 목소리가 또 낮아졌지만 이번에는 쿠로오도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 본인이 설마 모른다는 말은 아니겠지. 입을 슬쩍 내밀고 내려다보고 있으니까 이번엔 켄마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으웅, 켄-, 테츠도 있다.”
그리고 낮잠을 자고 나온 에이키가 문을 열고 눈을 비비며 나왔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모양인지 휘청휘청 걸으며 켄마와 쿠로오에게 걸어왔다. 켄마가 손을 내밀어서 아이를 받았다. 아이를 안고 제 무릎에 올려서 토닥여주자 에이키는 꼬물거리며 품에 안겼다. 그리고 그런 둘 앞에 쪼그려 앉아 쿠로오는 에이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잘 잤어요?”라고 물어보았다.
“웅, 테츠-왜 안 와썼어?”
에이키가 눈을 자꾸 비비는 걸 손으로 떼어내고 눈가에 가볍게 입을 맞춰주었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비록 전화는 매일 꼬박꼬박 했는데도 둘은 아주 몇 달을 못 본 사이처럼 굴었다. 켄마 품에 있다가 그런 쿠로오에게 손을 벌려 목 뒤로 작은 손을 꼭 걸었다. 쿠로오가 얼른 아이의 엉덩이를 받치고 들어 올려 켄마 옆자리에 앉았다. “테츠, 바빠꾸나.” 아이의 느린 말에는 아직도 포근한 이불이 남아있었다. “응, 미안.” 쿠로오는 그 짧은 대답을 하면서도 아이의 볼과 이마와 콧잔등에 입을 맞추기 바빴다.
“괜차나, 용서해줄게.”
대신 아빠랑 엄청 재밌게 놀았으니까. 그 말을 하며 에이키가 쿠로오의 머리를 톡톡 가볍게 두드렸다. 그으래? 나만 빼놓고 재밌게 놀았어? 쿠로오가 아이의 젖살에 제 입술을 묻고 바람을 불어넣었다. 까르르, 아이가 또 넘어갈 듯이 웃었다. 그렇게 잘 노는 둘을 다정하게 바라보던 켄마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켄마?” 쿠로오가 일어난 켄마의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
“파스타 해올게.”
“파스타!”
에이키가 다리를 흔들었다. “혼자 하려고?”라고 물어보며 쿠로오는 슬쩍 켄마의 손을 쓸었다. “오랜만에 왔는데 에이키랑도 이야기 해.” 켄마의 말에 쿠로오는 괜히 깍지도 끼다가 손을 풀었다. “알았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동안 쿠로오는 부엌으로 향하는 켄마를 바라보았다. “파스타도 좀 배워볼까.” 그렇게 에이키에게 말하는 건지 혼잣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을 했더니 에이키가 쿠로오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테츠, 방에서 놀면 안 돼?”
“너 또 누워서 뒹굴 거리려고 그러지.”
“히잉.”
누굴 닮아서 이렇게 노는 것도 정적이야! 배구 할 때는 엄청 폴짝폴짝 잘 뛰어다니면서. 쿠로오가 입술로 이를 감싼 채로 에이키 콧잔등을 물었다.
그래도 결국 에이키에게 손이 잡히면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쿠로오는 매번 에이키를 재울 때만 들어온 방을 낮에 들어오게 되었다. 작은 책장에는 에이키가 좋아하는 동화책들과 사진 앨범들이 놓여있었다. “꺼내 봐도 돼?” 쿠로오가 그렇게 물어보자 에이키가 푹 꺼내서는 아무 페이지를 펼쳤다.
“이거 에이키!”
“와, 에이키 엄청 작다.”
애기니까 그런 거야! 지금은 아니라는 듯이 입술을 삐쭉 내밀면서 에이키가 변명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쿠로오는 인형을 물고 빨고 있는 에이키 사진을 보며 괜히 손으로 쓸어보았다. “어, 저 이불, 지금 에이키 침대의 이불이다.” 그렇게 말하니까 에이키가 제 침대로 돌아가 이불을 괜히 끌어안았다. 아기 때부터 쓰던 이불이구나. 그렇게 쿠로오는 앨범 하나 하나를 찬찬히 넘겼다. 에이키로 가득한 앨범에 가끔은 켄마의 사진도 있었다. 에이키와 같은 자세로 자는 켄마의 모습이나 켄마 품에 안겨 있는 에이키의 사진 같은 것이 그랬다. 그래도 주로 에이키 독사진이 많았다.
그리고 그 사진 밑에는 짤막하게 뭐라고 상황을 설명해놓은 메모가 있었다. [오늘은 파인애플을 처음으로 먹었다. 바르르 떨었다.] [이 인형이 좋은 거야?] 같은 문구도 귀여웠지만 쿠로오는 그 글씨도 너무 오랜만에 보는 거라 약간 뭉클해졌다. 초등학교 때 관찰 일기 쓰는 게 귀찮아서 늘 개학이 다 되어갈 때 쿠로오의 일기를 베끼던 켄마였는데 이렇게 꼼꼼하게 기록해두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마치 누군가에게 꼭 보여주기로 할 것처럼 그렇게 꼼꼼히 적은 메모와 그만큼 많이 찍은 사진들이 가득했다.
“이거도 봐.”
앨범을 한 장씩 읽고 있는 쿠로오는 조용했다. 에이키는 심심해진 모양이었다. 얼른 다시 책장으로 가 이번엔 검은 노트들 중 하나를 빼왔다.
“이거 켄마가 에이키 다 크면 주기로 했어.”
“뭘까?”
라고 말하면서 펼치자 날짜와 간단한 그 날의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육아일기. 이걸 보자 예전에 에이키가 ‘켄마가 편지를 써서 자기 주기로 했다’는 말을 했다는 걸 떠올렸다. 역시 그 때 그건 육아일기가 맞았구나. 쿠로오는 그렇게 생각하며 날짜를 앞으로 넘겼다. 가장 첫 장부터 볼까 싶어 넘긴 페이지에는 날짜가 적혀있지 않았다. 날짜가 필요 없는 글이 있었다.
일기장의 프롤로그는 켄마의 회고록이 적혀있었다.
순간 이 글을 읽어도 될까 망설였지만 쿠로오는 읽었다. “테츠-.” 옆에서 심심하다고 투정을 부리는 아이를 토닥여주면서도 쿠로오는 그 회고록을 놓지 않았다. 세 살 때의 발칙하고도 위험한 행동이나, 늘 힘들게 약을 먹고 몸이 안 좋았던 켄마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문제아라고 지칭했다.
하지만 쿠로오는 그 글을 읽으면서 담담하게 쓴 글에 자꾸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당사자가 아닌데도 절절하게 느껴지는 슬픔과 관계자였기 때문에 느껴지는 항변의 울분이 자꾸 쿠로오 안에서 뒤섞였다. 나는 그런 게 아니었는데, 나는 그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는데. 그것들도 모두 변명이 되겠지만 그래도 말하고 싶은 것들이 잔뜩 있었다. “테츠.” 에이키가 쿠로오의 무릎에 손을 올리고 올려다보았다.
“슬픈 이야기야?”
“왜 그렇게 생각했어?”
“켄마도 늘 보면서 울어….”
쿠로오는 에이키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간신히 가져다댔다. 한 번 그렇게 부딪히고, 울면서 쿠로오는 웃었다. “에이키도 나중에 크면 읽어봐.” 그렇게 말하고는 쿠로오는 마저 읽었다. “에이키도 책 읽을래.” 에이키는 드디어 쿠로오를 가만히 내버려두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쿠로오의 등에 기대 책을 읽던 에이키가 다시 책을 책장에 꽂고는 켄마에게로 가버렸다.
쿠로오가 검은 다이어리를 다시 책장에 넣어두고 나왔을 때는 에이키가 소파에 누워서 신년특집 만화를 보고 있었다. “켄마.” 쿠로오가 부엌으로 가 켄마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 켄마는 놀라지 않고 단지 ‘왜?’라는 의문만 가진 채 쿠로오를 돌아보았다. “도와줄 건 없어?” 평소와 같은 질문에 “음…. 이제 다 되었으니까 그럼 세팅 도와줘.” 라고 순순히 부탁을 하게 되었다.
“에이키, 손 씻고 오세요.”
세팅을 다하고 켄마가 파스타를 접시에 나누는 걸 보며 쿠로오는 에이키를 불렀다. 에이키가 느지막이 일어나 에잉 소리를 내며 화장실로 향했다. 손을 씻고 나온 에이키가 올라가기 편하도록 쿠로오는 에이키의 자리를 살짝 빼두었다. 켄마가 앉고 저도 앉고 잠시 기다리니 에이키가 어기적어기적 와서는 의자 위에 올라왔다. 그렇게 조용히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에이키를 재우는 건 이제 쿠로오의 몫이 되었다. 당연하게 에이키는 ‘테츠으.’라고 부르며 쿠로오에게 안겼고 쿠로오는 아이를 재우며 토닥여주었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잠들었다 싶으면 쿠로오는 조용히 방을 나왔다. 그리고 커피를 타서 옆방 문을 두드렸다. 안경을 끼고 머리가 부스스한 켄마가 나와 눈을 깜빡이며 거실의 소파로 앉았다.
그게 하루의 일과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직 일이 많이 남았어?”
“아니, 얼마 안 남아서….”
“무리하지 말고.”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쿠로오는 켄마의 눈가에 묻은 눈썹이나 입가의 부스러기나 그런 걸 털어주곤 했다. 물론 켄마도 마찬가지였다.
“아까…다이어리를 봤어.”
“…아.”
켄마는 그 이후로 말이 없었다.
“변명…인줄 알면서도 자꾸 속으로 변명하게 되는 게 부끄러웠어.”
“…….”
“그래도 그건 말해주고 싶어. 내가 그 날 널 두고….”
그러다가 쿠로오는 입을 다물었다. 두고 간 건 아냐. 다만 방 안에 퍼진 네 향에 다시 정신을 잃을까봐 나갔던 거고, 돌아오는 길에 애플파이 냄새를 맡고 네게 주려고 사오면서, 나는 네게 고백할 생각이었는데…. 이 모든 것이 정말 구질구질한 변명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억울한 감정을 없애자는 이유로 이 모든 걸 켄마에게 떠넘기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알아. 이제는 알 거 같아.”
그 때에 켄마가 이렇게 대답해주었다. 켄마가 모른 척 커피를 마시면서 쿠로오 무릎에 올려진 쿠로오의 손등에 제 손을 겹쳤다. 그리고 어차피 이제 알아봐야 변하는 건 없어. 그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켄마는 속삭였다. 켄마의 속삭임에 쿠로오는 오히려 속이 불편해졌다. 미간이 찌푸려진 쿠로오를 가만히 보던 켄마가 안경을 벗었다.
“아직 코코아를 좋아해. 애플파이도 좋아해.”
커피는 그저 잠을 자면 안 되니까 마시기 시작한 것뿐이야. 켄마의 말에 쿠로오는 가만히 켄마를 보고만 있었다. 담담한 표정의 켄마를 보고 있자면 마치 그 일기장의 켄마가 이런 표정을 지었겠구나 싶어졌다. 그와 동시에 쿠로오 본인의 감정도 조금씩 차분해졌다.
“그리고 배구는…힘들었지만 그래도 역시 나쁘지만은 않은 추억이었다고 생각해. 물론 지금 다시 하라고 한다면…음. 그건 다른 이야기…지.”
떠듬떠듬 켄마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바로바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진심이 담기고 여과되지 않은 순수한 마음이 바로 쿠로오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너도 좋아해.”
들어내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었지만 결국 되지 않았어. 켄마는 그렇게 말했다. 쿠로오는 그 표현이 못내 서운하고 미워서 제 손등에 올라간 켄마의 손을 잡기 위해 제 손등을 뒤집어 손바닥을 마주 댔다. 켄마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끼어 넣고는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따라 굽혀지는 켄마의 손가락에는 그 흔한 반지도 없었다.
“너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어쨌든 나는 너를 좋아하고 그래서…이젠 어찌 되었든 간에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싶다는 의미였어.”
켄마는 제 기분을 설명하며 아까 방금 기분이 나빴던 것에 대해서 사과를 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직설적으로 말하는 켄마에게 쿠로오는 더 이상 화낼 수 없었다. “응.” 애초에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일단 다 덮어두자고 말하는 게 마음이 아파서였을 뿐이었다.
“나도 이젠 사실 모르겠어.”
쿠로오는 켄마 머리 위에 제 머리를 기대며 말을 이었다.
“다 잊으라고 하면 그건 안 될 거야. 난 아직 침대에서 자는 게 무서워. 아마 나처럼 너도 어딘가 이유를 알면서도 고쳐지지 않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도 앞으로는 이제 나아질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응.”
켄마가 눈을 감았다. 쿠로오에게 기댄 채로 힘을 빼고 의지하고 있었다. 쿠로오도 마찬가지였다. 그 둘에게 몸에 들어간 힘은 둘의 손을 가볍게 잡고 있는 것 말고는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에게 기대서 앉아있던 둘은 끔뻑이며 눈을 떴다.
“피곤해.”
“나도….”
둘 다 최근까지 신경 쓸 거 많고 예민했던 바람에 제대로 쉬지 못했던 게 컸던 모양이었다. “쿠로가 에이키랑 자.” 그렇게 말하자 쿠로오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너 요즘 밤 샜잖아. 네가 들어가서 자. 난 집에서도 소파에서 자서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소파에서 재울 수 있겠냐고 켄마가 투덜거렸다. “쿠로, 에이키랑 잘 때면 너무 편해보여서 내가 못 깨울 정도로 자는데.” 쿠로오는 그 말을 못 들은 척했다.
“그럼 같이 자자.”
“어? 침대 그 정도로 컸었…나? 내가 잘 때 자리가 좀 남긴 했지만….”
“붙어 자면 어찌 될 걸?”
“우리 중에 가장 몸부림이 심한 게…에이키구나.”
“그럼 에이키를 사이에 끼우고 자자.”
“그럴까.”
쿠로오가 졸린 눈을 하고 힘없이 웃었다. 내일 그럼 에이키 눈 뜨면 엄청 놀라겠네. 켄마도 입꼬리만 간신히 올려 몇 초 웃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쿠로오가 먼저 일어나고 켄마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둘 다 잠에 반 쯤 취한 채로 방에 들어갔다. 에이키의 양 볼에 둘의 입술이 붙었다 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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