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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켄]봄 눈 시린 9 본문

ㄴ쿠로켄

[쿠로켄]봄 눈 시린 9

2017. 10. 9. 18:25






시즌은 계속 되었고 주말마다 쿠로오의 주가는 날이 갈수록 물이 올랐다. 보쿠토, 카게야마의 무서움 속에서 묻혀있었던 쿠로오가 드디어 빛을 발한다며 스포츠 언론에서 연신 떠들어댔다. 다시, 그 옛날 춘고전 때와 대학 배구때를 언급하며 그 때를 넘어서는 배구 경기들이 펼쳐질 거라고, 배구가 재미없는 사람들도 모두 배구를 보게 될 것이라는 배구 기사들의 자화자찬이 무색하지 않게 점점 쿠로오 소속팀은 완성도를 높여갔다.

그렇게 천천히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떻게 크리스마스이브가 월요일일 수 있을까. 차라리 주말이었다면 경기 핑계를 대고(실제로 주말마다 리그가 진행되고 있었고 경기가 없는 날에도 연습은 하기 마련이었다) 끝까지 거절할 수 있었을 텐데. 물론 그럴 수 없었다는 걸 알면서도 쿠로오는 어떻게든 자기합리화를 했다. 마침 또 일요일이 경기라 쿠로오가 월요일에 오후 반차를 쓰는 것에 누구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차라리 누구라도 붙잡아 주었으면 좋겠는데. 막상 붙잡는다고 해서 남아있을 것도 아니면서도 그랬다. 히나타는 저녁 먹으러 갈 테니 꼭 그 때까지만 잘 버텨달라는 시늉을 했다. 야쿠에게도 응원문자가 왔다. 5시에 도착한다고 말하면서 그 때까지 쫓겨나지 말라는 응원이었다. 아카아시는 아예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다고 했다. 다들 켄마가 쿠로오를 쫓아낼 것이라는 확신이 담겼다.

아니 어떻게든 올해 안으로 승부 보라던 놈들이.

쿠로오는 난데없는 불청객 취급에 괜히 울컥했다.

뭐, 무리도 아니긴 했다. 사실 쿠로오 본인도…쫓아내진 않더라도 아마 갑자기 서늘해지는 분위기에서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잘 지냈냐는 안부를 물어야할지, 아니면 왜 이런 사실을 내게 숨겼었냐고 물어봐야할지, 그것도 아니면…. 쿠로오는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아니, 말하기도 전에 어쩌면 물 맞고 쫓겨날지도 몰라.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쿠로오는 파이 냄새가 물씬 풍기는 가게로 들어왔다. 이 집은 예전에도 한번 온 적이 있었던 가게였다. 그 때도 맛있는 냄새가 났지만 애플파이로 유명한 집이라는 건 후에 알았던 정보였다. 물론 냉장고에서 차갑게 곰팡이가 핀 후에야 상자에서 나올 수 있었던 애플파이는 굳이 먹지 않았지만. 여기에 오고 익숙했었던 냄새를 다시 맡은 쿠로오는 그제야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라는 걸 깨달았다. 가슴이 떨리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안색이 급격히 나빠지자 계산대 앞에 서 있던 직원이 쿠로오를 보고 “무슨 일 있으신가요?”라고 물어보았다.

“아뇨, 아무 일도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도 이미 파리한 기색이 묻어나왔다. 괜히 미안해지는 마음에 쿠로오는 입을 잠시 떼었다가 다시 도로 숨만 내뱉고 합 입술을 붙였다. ‘애플파이 홀 사이즈로 하나 포장해주세요.’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근데 테츠, 아빠가 좋아하는 거 줘도 좋지만 아무거나 선물해도 아빤 좋아할걸? 아빠는 내가 종이 접어주는 것도 좋아하는데…. 그리고 아빠도 착한 일 많이 해서 아빠도 산타 할아버지가 아빠 갖고 싶은 걸로 선물하실 테니까 괜찮아. 그리구 뭐든 선물은 감사한 거라고 했는걸!’

그럴 때 갑자기 에이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누굴 닮아서 이렇게 기특한 소리를 하는 거냐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한껏 예뻐해 줬던 게 생각나서 피식 웃었다. 아, 다시 숨이 쉬어졌다. 쿠로오는 목 위로 손을 가져다 대 살짝 목을 감쌌다. 차가운 손에 닿는 따뜻한 목이 안도감을 가져다주었다.

“애플파이 홀 사이즈로 하나 포장해주세요.”

“선물용이신가요?”

“…네.”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는 리본을 묶어주며 포장해주는 걸 기다리는 동안 바짝바짝 입이 자꾸 말랐다. 손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 주먹을 쥐었다가 풀길 반복했다. 쿠로오는 입술을 자꾸 깨물었다. 숨은 점점 가빠지는 것만 같았다. 시합을 할 때보다 몇 배는 더, 긴장하고 있었다. 넥타이, 하고 올걸. 쿠로오는 자꾸 제 목을 매만졌다. 터틀넥 형식의 니트를 일부러 입은 건데도 쿠로오는 계속 후회가 되었다. 사실 니트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게 다 후회가 되고 걱정이 되고 무섭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예전에 왔을 때는 기쁘기만 했다. 아니, 조금 무서운 건 있었다. 딱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던 켄마의 페로몬에, 유혹에 넘어갔던 그 날 밤. 그 날 아침, 이곳에서 포장되는 애플파이를 기다리기까지만 해도 켄마가 술김에 내게 고백한 게 아닐까, 그러니까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준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너와 하고 싶었어.’라는 대사를 들은 순간부터 쿠로오도 기억이 새하얗게 날아갔었고 그렇기에 쿠로오는 깨닫지 못한 거였다. 감기약과 예상치 못한 알코올, 그리고 제 시간에 먹지 못한 호르몬 약 두 알. 왜 우성오메가는 늘 약을 달고 살아야하는지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 없는 무지와 오해의 산물이었다. 그걸 깨달은 것도 벌써 오 년이 지나고 지금에서야 알게 된 거였다. 그렇기에 쿠로오는 무서웠다.

또, 그 때의 서늘했던 제 집처럼, 다음엔 그 집이 비워지지 않을까하고.

이젠 무서웠다. 두 번째는 너무 무서웠다. 한 번의 공포를 알기에 더 무섭게 다가오고 있었다. 인사도 떠오르지 않고 머릿속이 계속 뒤죽박죽 섞였다. 무엇부터 말하는 것 이전에 감정마저도 마구 뒤섞여버렸다. 눈물이 나면서도 어떻게든 그 때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사람을 눈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담으려고 계속 바라보고, 그러면서도 입술은 뭔가를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 없어서 계속 오물거리기만 할 것이다. 그럴 것 같았다.

[마론] 302호…. 302호…….

주소는 이미 다 외웠는데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늘했던 감각이 자꾸 머릿속에서 되감기되고 있었다. 쿠로오 테츠로, 정신 차려. 그렇게 주문을 외워도 결국 다시 머리가 새하얘졌다. 발걸음은 계속 느려지고 그런데도 목적지는 점점 가까워졌다. 온 몸의 혈관들이 모두 긴장하며 두근거렸다.

결국엔 발걸음이 멈췄다. 다리가 그대로 언 것 마냥 움직이지가 않았다. 사실 움직일 생각도 없었다. 쿠로오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섰다. 늘 에이키를 만나던 그 놀이터 벤치 앞에서 멈춘 채 잠시 눈을 감았다. 마음 같아서는 주저앉아서 잠시 감정을 정리하고 싶었지만 지금 앉으면 그 후에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 그냥 서 있기로 했다. 눈을 감고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느꼈다. 거기에만 집중했다. 허튼 생각이 들지 않게끔 노력했다.

그러자 가슴 쪽에서 진동이 울렸다. 바보 같이 하마터면 진동에 놀라 펄쩍 뛸 뻔했다. 눈만 동그래진 채로 쿠로오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폰 화면에는 [에이키]라고 적힌 글자가 떠 있었다. 쿠로오는 괜히 그 전화를 받기 전에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저를 내려다보는 사람은 없어보였다…. 혹시 이 아이, 초능력을 쓰는 건 아닐까. 천리안? 그런 생각을 잠시 했다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바로 인지하고 나서 한숨처럼 긴 숨이 쿠로오 몸 안에서 나왔다. 갑자기 생긴 일에 긴장이 풀리면서 슬금슬금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왜 안 오냐고 혼나는 건 아니겠지. 아직 약속 시간은 남았다는 걸 상기하며 쿠로오는 전화를 받았다.

“…응, 에이키.”

그러나 귓가의 에이키는 들뜨지도, 화내지도 않고 어딘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내고 있었다. 아니, 아니었다. 부스럭대는 소리가 아니라 훌쩍이는 소리였다. 울고 있었다. 그 순간 찬물이 끼얹어진 사람처럼 쿠로오는


“에이키, 무슨 일이야.”


정신을 차리고 떨어지지 않던 발을 바삐 놀렸다.

-…테츠.

“응.” 쿠로오는 얼른 짧게 대답하곤 훌쩍이는 아이의 목소리를 놓칠 새라 도로 입을 다물었다. 테츠, 어떡해? 아이의 목소리가 많이 떨고 있었다.

-아빠, 죽었어….

“뭐?”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는 찰나에 기억 속에서 아카아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코즈메 같은 사람에겐 흔한 일인데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에 쿠로오는 말이 빨라지고 커지기 시작했다.

“에이키, 아빠 코에 손가락 가져가볼래? 어때? 숨 쉬고 있어? …응, 응. 그럼 에이키…, 아니다. 지금 앞이야. 응, 가고 있으니까 문, 열어줄래? 아니, 지금 말고, 지금 계단, 올,라가고, 있으니까, 지금!”

그리고 순식간에 뛰어올라간 3층 어딘가의 현관문이 열렸다.

“테츠!”

그리고 신발도 채 신지 못한 채 맨발로 문손잡이를 잡고 매달려서 테츠만 보며 눈물을 펑펑 흘리는 아이를 얼른 안아 올렸다. “괜찮아. 괜찮아. 응? 아저씨 왔잖아.” 쿠로오는 얼른 아이의 등을 쓸고 토닥이며 한쪽 손으로 문을 닫았다. 아이를 안은 손에 들고 있었던 선물들을 빈손으로 옮겨 바닥에 내려놓고 신발을 벗으며 아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이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가 부엌 쪽에 사람이 쓰러져있는 걸 확인했다. 일단 먼저 쿠로오는 켄마에게 달려가 켄마의 목 쪽의 맥을 짚었다. 숨도 제대로 규칙적으로 쉬고 있는지 확인했다. 그 후에는 고개를 돌려 부엌을 바라보았다.

“에이키, 병원 가야 하니까 양말 신고 위에 따뜻한 점퍼 걸치고 나와. 그리고 혹시 아빠도 추울 수 있으니까 아빠 옷도 하나 가져다줄래?”

그렇게 아이의 눈을 잠시 맞추고 지시하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쿠로오는 켄마를 업기 전에 먼저 부엌으로 향했다. 가스를 확인했다. 음식은 막 조리된 것 같은데 불은 어쨌든 다 꺼져있었다. 밸브도 잠겨있었다. 또 뭘 챙겨야 했지. 쿠로오는 창문들을 잠그고 에이키가 나오는 걸 확인 후 에이키가 가지고 온 겉옷을 켄마의 팔에 대충 끼웠다.

“혼자서 잘 입었네. 잘했어.”

그리고 채 올라가다 만 에이키 겉옷의 지퍼를 끝까지 올려주고 켄마를 등에 업었다. 그러면서도 한 손을 내려 에이키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내려가서 조금만 걸으면 택시 정거장이 있었다. 자꾸 빨라지려는 제 속도를 최대한 늦추면서 쿠로오는 에이키의 보폭에 맞췄다. 마음 같아서는 하난 업고 하난 안고 뛰고 싶을 정도였다. 입술을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꽉 물고 계단을 내려온 쿠로오는 얼른 걸어 큰길가로 나갔다. 마침 택시기사가 잠시 바람을 쐬는 중이었는지 내려서 멍하니 택시에 기대섰다가 아이 하나는 손에 잡고 어른을 업고 뛰어오는 쿠로오를 보고 얼른 차문을 열어주었다. 에이키를 먼저 들여보내고 쿠로오가 타서 켄마를 창문쪽으로 뉘었다. 중간에 앉은 쿠로오가 켄마의 안전벨트를 채워주고 나서 “병원으로 가주세요!”라는 말을 하자마자 택시기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출발했다.

“테츠.”

“괜찮아. 괜찮아.”

옆의 에이키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으면서 아이의 눈가를 쓸어주었다.

“울지 말고. 괜찮아. 의사 선생님이랑 간호사 선생님들이 낫게 해주실 거야. 에이키도 아플 때 병원 가면 이제 괜찮아지지? 그런 거야.”

그러면서도 혼자서 안전벨트를 맨 것에 대해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그래도 충격이 컸는지 도통 에이키는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우는 건 멈췄어도 여전히 불안해했다. 택시가 멈춰 서자마자 쿠로오는 기다렸다는 듯 돈을 내밀었다. 그리고 켄마를 다시 업고 밖에서 에이키가 나오는 걸 기다렸다. 에이키가 대신 잔돈을 받았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오는 아이의 손을 잡아 내려오는 걸 부축한 후 “감사합니다.” 인사를 드리고 문을 닫았다. 다시 에이키의 손을 잡고 병원 응급실로 달렸다.

“사람이 쓰러졌는데 좀 봐주실 수 있나요?”

그 말과 함께 안 그래도 바쁜 응급실이 또 술렁였다. “여기 환자분, 조심히 눕혀주세요.” 간호사들이 얼른 뛰어와 쿠로오 등에 있던 켄마를 받아 눕히는 걸 도와주었다. “어쩌다가 오셨나요?” 그 말에 쿠로오는 잠시 에이키를 바라보다가 “사람이 쓰러졌어요. 갑자기 쓰러진 것 같습니다.” 라고 말했다.

“에이키 아니니?”

그러다가 다른 곳에서 오고 있던 간호사가 에이키를 알아봤다. 그러고는 “코즈메 씨?”라고 말하고는 이쪽으로 황급히 걸어와 간호사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누군가에게 무전을 했다. 간호사 하나가 자신이 가보겠다며 뛰었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일단 여긴 맡기시고 잠시 진정시키고 오시는 게….”

그렇게 급박하게 굴러가는 상황에서도 에이키를 알아봤던 간호사는 쿠로오에게 말을 걸면서 슬쩍 에이키를 내려다보았다. 쿠로오는 그 말뜻을 얼른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이고 에이키를 덥석 안았다. “복도에 있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쿠로오는 에이키를 안은 채로 잠시 복도에 나왔다.

“흐, 흑….”

그리고 조용한 복도에 나오자마자 바르르 떨리는 어깨가 느껴지고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쿠로오에게도 에이키를 알아보는 간호사가 있는 병원과 켄마를 보자마자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지시를 내릴 수 있는 간호사가 있는 병원이라는 곳에 대한 여러 감정들이 밀려들어왔다. “괜찮아.” 쿠로오는 계속 그렇게 말하면서 등을 쓸어주었다. “괜찮을 거야.” 에이키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말하는 거였다.

“사실…. 예전에 아빠가아, 이거 알려줘썼는데….”

아빠랑 그 때 같이 했을 때처러엄, 아빠가 쓰러지며는 불 끄고 가스 밸부 잠그고 했는데. 아빠가…구급차 아저씨 부르는 거라고, 지금은 전화하지 못하지만 나중에 아빠가 아프면 에이키가…에이키가 불러달라고 했는데….

“에이키, 전화 못해써. 그래서, 흑, 테츠, 도와달라고….”

쿠로오는 아이의 등을 가만히 쓸어주었다. 아이의 물러지는 발음들이 너무 안쓰러워서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것 같았다. “잘했어.” 쿠로오는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켄마다웠다. 자기가 아프니까 혹시나의 상황에 대비해서 아마 몇 번이고, 기회가 될 때면 주기적으로 가르쳤을 것이다.

“에이키가 태어나서 아빠가 더 힘든 거지….”

그리고 뒤이은 에이키의 말에, 왔다 갔다 하며 아이를 달래던 쿠로오의 발이 뚝 멈췄다. “…아냐.” 쿠로오는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유독 켄마에게 약해보이고 눈치를 보는 건 그런 이유였을까. 쿠로오는 슬쩍 고개를 숙여 에이키 머리에 기댔다.

“그렇게 말하면 슬퍼.”

너도, 켄마도, 그리고 나도.

한참을 그렇게 달래서 겨우 에이키가 눈물을 그쳤다. 물론 눈물을 그쳤다기보다는 이제 진이 다 빠져서 기운이 없는 것 같아보였지만. 그래도 적어도 에이키 스스로도 더 이상 울어봐야 좋을 것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복도로 뛰어오던 발걸음 소리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누군가 응급실로 뛰어오나 보다 싶어 쿠로오가 소리가 멈춘 곳을 바라보았다.

“아.”

쿠로오를 보고 그 사람은 그런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런 소리를 내는 사람을 보고 쿠로오도 작게 그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런 쿠로오 품에서 반쯤 잠들던 에이키가 고개를 들어 건너편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눈을 비비며 그 사람을 마주보고 “아.” 똑같은 소리를 내고 뒷말을 덧붙였다.

“할머니-.”

“…쿠로오…군.”

에이키가 불렀는데도 그 사람은 쿠로오만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키가 고개를 따라 들어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테츠?” 테츠라는 이름이 에이키에게서 나오자마자 코즈메 씨는 이해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결국 켄마에게 먼저 하려던 인사말을, 쿠로오는 켄마의 어머니께 먼저 건넸다. 병원에서 연락한 걸까. 아까 에이키를 알아본 그 간호사겠지. 쿠로오는 눈을 깜빡이다가 에이키를 내려놓았다. 에이키는 쿠로오 눈치를 살피며 손을 내미는 할머니에게로 슬금슬금 걸어갔다.

“데리고…와줘서…고마워요.”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이 “코즈메 씨.” 의사와 간호사가 복도로 나왔다. 의사가 쿠로오를 보고 할머니 뒤에 숨은 에이키를 잠시 보다가 다시 코즈메 씨께 고개를 돌려 용건을 전했다. “코즈메 켄마 씨는 일단 큰 문제는 다행히 없었구요. 최근 호르몬 약 복용 중에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다보니 과로와 약기운에 잠시 쓰러지신 것 같습니다. 지금 링거 조치했고 아마 쓰러지면서 가벼운 뇌진탕 우려가 있으니까 일어난 후에 저를 다시 불러주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들어갔다. 의사를 따라서 쿠로오와 에이키와 코즈메 씨는 누워있는 켄마를 보러갔다. 쿠로오는 이제 한숨을 돌리고 오랜만의 켄마를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있지만 파리한 안색과 푸석해 보이는 피부만 봐도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예전보다 더 마른 것 같아. 근육이 빠진 걸까. 볼 살도 빠졌어.

전체적으로 자기 안의 그 켄마의 모습이 많이 무너졌는데도 쿠로오는 예상과 달리 슬프거나 안타깝거나 하지 않았다. 무덤덤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쿠로오의 눈치를 살피는 건 오히려 코즈메 씨였다.

“이만 가 봐요. 바쁠 텐데….”

하지만 쿠로오는 꽤나 담담한 눈으로 코즈메 씨를 바라보았다.

“아뇨, 일단 오늘 켄마 집에 오겠다고 한 사람들이 있어서요. 집이 비어져있으면 놀라니까 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정리해놓고 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일어났다. 어느새 할머니 품에서 졸고 있던 에이키가 쿠로오 일어나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 아이는 말이 없었지만 쿠로오를 빤히 바라보았다. 쿠로오는 그런 에이키에게 웃어주었다.

“에이키, 가볼게. 조금 이따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줘.”

그리고 다시 코즈메 씨와 눈을 맞추고 목례했다. 쿠로오는 그 길로 다시 켄마의 집으로 향했다. 아까보다는 천천히 걸어올라가 302호 현관문 앞에 섰다. 손잡이를 돌리자마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안에서 열렸다.

“무슨 일이야, 왜 아무도 없어!”

5시에 온다고 하던 야쿠가 드물게 화를 내면서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쿠로오는 일단 들어가자는 식으로 야쿠를 다시 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신발을 벗은 후 아까 신발장 근처에 내려놓았던 선물들을 다시 들었다.

“켄마랑 에이키는?”

야쿠는 아직 급한지 느긋하게 집을 살피는 쿠로오를 보며 둘의 위치를 물어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쿠로오는 아까는 구경하지 못했던 둘의 집을 눈에 찬찬히 담아두었다. 부엌으로 향해 애플파이를 집어넣고서야 답했다.

“켄마가 쓰러져서 병원에 갔다 오는 길이야.”

“뭐?”

“코즈메 씨가 오셔서 켄마와 에이키를 돌봐주시는 중이셔.”

“코즈메 씨면 에이키 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나 보고 엄청 놀라시던데.”

야쿠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제 얼굴을 손으로 긁듯이 훑었다. “켄마한테 죽었다.”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숙이는 걸 보고 쿠로오는 피식 웃었다. 그 웃는 게 꼭 옛날 고등학생 때와 비슷해서 야쿠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나 내일 켄마 만나고 싶어.”

내일 밥을 먹겠다는 말인줄 알았을 정도로 너무나 평온하게 말하는 폭탄에 야쿠는 잔잔하게 퍼져나가는 물결을 느끼며 뒤늦게 “…뭐?!”라고 외쳤다.

“…진짜? 결심했어?”

“응. 마음 정리했어.”

쿠로오가 성큼성큼 걸어서 간 곳은 거실의 크리스마스 트리였다. 고무나무에 감겨진 리스가 어쨌든 자신이 평소에는 실내 분위기용 고무나무지만 지금은 크리스마스용 트리라는 걸 강조하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리스를 만지작거리던 쿠로오는 이와 비슷한 일이 옛날에도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말인데, 내일 오후에 에이키 좀 봐줄 수 있어?”

“…내일 방학식이니까 가능해.”

화분 밑에 에이키 선물을 내려놓는 쿠로오를 보며 야쿠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런 야쿠를 보며 쿠로오가 쓰게 웃었다. 자기를 위해 계속 이렇게 생각해주는 친구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더 미안해졌다.

“나 때문에 네가 자꾸 곤란해지네.”

“…아, 뭐. 이런 일을 벌였을 땐 이미 나도 켄마에게 혼날 각오를 하고 저지른 거니까 괜찮아. 이렇게 큰 사고를 치면서 어떻게 안 혼나겠냐.”

야쿠는 믿음직한 얼굴로 씨익 웃었다. 허리에 두 손을 올린 포즈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야쿠는 믿음직한 리베로였다.

“그나저나 조심해. 어쨌든 켄마는 환자니까.”

“야쿠.”

쿠로오가 야쿠를 가만히 불렀다. 목소리가 조용해서 야쿠는 괜히 쿠로오가 또 우울해하는 걸까 싶어 눈치를 살폈다. 쿠로오는 웃고 있었다. 어딘가 털어낸 사람마냥 픽 입꼬리까지 올리고는 옛날처럼 자신 있게 말했다.

“네가 최근에는 켄마를 많이 돌봐줬지만, 십 년 넘게 돌본 건 나니까요.”

그 정도는 네가 말하지 않더라도 다 잘 안답니다.

그 말에 야쿠는 픽 웃었다. 주먹을 내밀어 쿠로오의 등에 푹 박았다. “악!”이라는 소리가 들렸지만 야쿠는 그 소리도 너무 반가워서 웃었다. “짜식, 건방 떨기는.” 그 말이 진심이었지만 욕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건 아니었다. 그걸 아니까 쿠로오도 웃었다.

“내일…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오히려 켄마를 만나는 게 더 긁어 부스럼이 될 수도 있었다. 이 집에 오기 전에 고민했던 것처럼, 어쩌면 최악에는 켄마와 에이키는 이제 정말 소식이 끊길지도 모른다. 지금 옆에서 도와줬던 야쿠나 히나타나 아카아시까지 끊어내고 이 집은 서늘한 기운만 남은 집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쿠로오는 결심했다. 해야 할 말이 드디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눈을 떴을 때는 집 다음으로 익숙한 병원 천장이었다.

물이 끓는 걸 기다리고 있었는데 뒤에서 에이키가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었고 그대로 돌아보려고 했던 것에서 기억이 끊겨있었다. 눈을 깜빡이자 천장이 훤히 잘 보였다. 고개를 돌린 켄마는 어머니가 잠든 에이키를 토닥이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엄…마.”

“일어났어? 몸은 좀 어때? 머리는 안 아프고?”

“자고 일어나서 몸은 괜찮아요. 머리도요. 에이키, 무겁진 않으세요?”

몸을 일으켜 앉고는 어머니의 품에서 기어코 에이키를 떼어 내어 제 침대에 눕혔다. “이제 무게가 있어서 계속 그렇게 안고 앉아있으시면 힘드실 텐데….” 그렇게 말해도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시는지 어머니는 좀처럼 답이 없으셨다. 켄마는 에이키의 머리를 쓰다듬고 어머니를 기다렸다.

“혹시, 지금이라도 엄마랑 아빠랑 같이 사는 건 어떻게 생각해?”

“…걱정 끼쳐드린 건 죄송하지만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집을 알고 있을까봐 걱정이라면 이사는 또 가면 되잖니.”

“엄마. 저 정말 에이키, 키울 수 있어요. 혼자서.”

켄마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켄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쓰러져놓고, 부모님을 걱정시키고 에이키에게 뒤처리를 다 시킨 주제에 정말 혼자서 키울 수 있다고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건지…. 그래도 키울 수 있었다. 키우고 싶었다. 켄마는 코즈메 에이키의 아빠고 보호자니까.

“…쿠로오 군이 병원에 데려다줬어.”

그러나 어렵사리 어머니가 던진 말에 켄마는 전구가 깨지는 것 같았다.

“역시 너도 몰랐던 거구나.”

‘역시’? 켄마는 갑자기 등장한 이름에 왜 ‘역시’가 붙는 지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이 더 필요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어머니부터 심호흡을 하기 시작하셨다. 떨리는 두 손을 깍지 끼며 켄마에게 말했다.

“쿠로오 군을 에이키가 ‘테츠’라고 부르던데….”

“…테….”

쿠로오 ‘테츠’로. 오랜만에 켄마는 그 이름을 떠올렸다.

아까는 전구가 깨졌다면 이번에는 거울을 깨트리는 소리가 머리에서 울렸다. 켄마는 미간을 짚었다. 쇼요, 야쿠군…아카아시. 셋 다 언제부턴가 수상한 낌새가 많았다. 눈치를 채지 못한 게 오히려 바보 같아질 정도였다. 켄마가 머리를 짚을 때쯤 마침 의사가 찾아왔다. 켄마에게 CT상의 문제는 없었지만 혹시나 머리에 통증은 없는지를 물어보았고 괜찮다는 켄마에게 고개를 끄덕였고 같이 온 간호사는 이제 다 맞은 링거를 정리해주었다.

바로 켄마는 제 옆에 있던 제 겉옷을 걸치고 자고 있는 에이키를 깨웠다. 자다 일어난 에이키는 켄마를 보고도 칭얼거렸다. “켄마-, 안아줘-.” 그렇게 말해도 켄마는 에이키에게 고개를 젓기만 했다. “미안, 에이키. 나도 힘들어.” 그렇게 말하자 에이키는 칭얼거리는 소리를 내도 결국 켄마의 손을 꼭 잡고 눈을 손으로 비비기만 했다.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집에 가볼게요, 엄마.”

“켄마….”

“일단 주변…사람들하고 이야기를 먼저 해보고요.”

“그래, 알았어. 대신 끝나고 연락 줘. 걱정하니까.”

그 질문에 고개로 까딱하고 켄마는 걸었다. 창구에서 응급실 비용을 결제하려고 하니 이미 결제가 되었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입술을 깨문 채로 졸음이 쏟아져서 자꾸 느리게 걷는 에이키를 살짝 잡아 끌 듯 에이키 보폭보다 조금 빨리 걸으며, 켄마는 전화를 걸었다. 야쿠군은 이미 손을 썼을 게 뻔하고 쇼요라면 도망가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선택한 상대방이었다.

-지금쯤 전화 올 거라 생각했어.

아카아시 케이지. 최근 들어 유치원을 같이 알아봐주면서도 켄마에게 넌지시 혼자 키우는 건 힘들지 않겠냐고 말했던 사람. 목소리는 정말 예상했다는 듯이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어디부터 이야기하면 돼?

“전부.”

-길어지겠네.

병원 입구로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고급 브랜드의 중형차 한 대가 멈췄다. 운전석에서 아카아시가 나왔다. 잠이 와서 이젠 거의 눈을 감고 서있는 수준인 에이키를 마지막까지 달래고 달래 차 안에 앉힌 켄마는 이제 차에 앉자마자 본격적으로 눈을 붙인 에이키에게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음악도 틀지 않고 조용히 달리던 차 안에는 대화도 없었다. 켄마는 제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잠든 에이키를 토닥이며 에이키 옆의 창문만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평일인데도 날이 날인지 길거리엔 평소보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녔다. 신호에 걸려 잠시 차가 멈췄다.

“…처음 쿠로오 씨께 연락드린 건 나야.”

아카아시는 차분하게 말하면서도 거울로 곁눈질해 창문만 가만히 바라보는 켄마를 한번 살폈다. 켄마의 날카로운 노란 눈은 햇볕을 머금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은 아카아시를 보지 않고 있었다.

“유치원 입학 서류에서부터, 공식적으로 에이키는 ‘코즈메’가 되잖아.”

“쓸데없는 짓을 했네.”

아카아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켄마는 툭 내뱉었다. 여전히 시선은 창문 밖에 고정시킨 채 에이키 어깨에 슬쩍 제 손을 올리고 작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여전히 아카아시와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에이키는 코즈메 에이키야.”

“…….”

“그거면 충분해.”

그렇게 말하면서 차가 조금이라도 흔들린다 싶으면 켄마는 얼른 에이키를 무의식적으로 챙겼다. 딱히 도움 같은 거 없어도 잘 살고 있고…. 뒷말이 점점 작게 들려 뭉개졌지만 아카아시는 그 말이 ‘굳이 쿠로오에게 의지하고 싶지 않다’는 거라는 걸 파악했다. 차가 막히는 바람에 차로 10분. 작은 맨션 앞에 차가 멈추고 켄마가 문을 열었다. 아카아시가 채 내리기도 전에 켄마는 네 살 치고는 꽤 큰 편인 에이키를 안아들었다. “도와줄게.” 그 말에 켄마는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는 괜찮아.” 그렇게 말하곤 계단을 올라가다 중간에 잠시 멈춰 서서 다시 에이키를 고쳐 안았다. 그리고 다시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아카아시는 그걸 가만히 차에 기대 바라보았다.

“코즈메.”

아카아시가 켄마를 불렀다. 켄마가 고개를 드디어 돌려 아카아시를 바라보았다. 아카아시는 드물게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어떻게 꺼내야할지 몰라 망설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짧게 변명하자면, 나는 쿠로오 씨께 네가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만 말했어.

그리고 그런데도 너를 만나겠다고 선택한 건…, 쿠로오 씨야.”

아카아시는 그렇게 말하고는 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운전석에 올라타 다시 돌아갔다. 덩그러니 남은 건 계단 위, 그 차가 빠져나가고도 한참 멍하니 서 있는 켄마와 켄마 품의 에이키였다. 켄마는 거기에 서서 오후의 시간을 가만히 흘려보냈다. 에이키가 품에서 바스락거리며 파고드는 건 그냥 잠결에 한 행동이라고 짐작하고 다시 아이를 고쳐 안아 계단을 올랐다.

이제 겨우 1층 반이었다.

이제 겨우 포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아빠.”

에이키의 목소리에는 잠이 아직 묻어있었다. 일어났어? 켄마가 속삭이자 켄마의 품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주세요. 에이키의 목소리에 켄마가 무릎을 굽혀 아이를 복도에 내려주었다. 눈이 반쯤 감긴 에이키의 눈을 쓸어주고 이마에 입을 맞춘 후 켄마는 다시 똑바로 섰다.

집에 들어가자 주동자 둘이 모두 집에 있었다. 야쿠도 히나타도 에이키와 함께 들어온 켄마의 소식을 다 전해들은 것인지 현관까지 허겁지겁 뛰쳐나와 “몸은 괜찮아? 병원에는 뭐래?”라고 물었다. 켄마가 노려만 보고 있자 뒤늦게야 켄마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제 왔으니까 집에 가도 돼.”

그렇게 말하며 집에서 쫓아내려는 걸 야쿠가 더 안절부절 못했다. 할 말이 있는데 할 말을 지금 하면 안 되겠지. 하지만 말은 해야 하는데. 켄마의 눈치만 살핀다고 어떻게 운을 띄워야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는 찰나에 히나타가 끼어들었다. 역시나 불안한 눈치였지만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에이키랑 오늘 파티하기로 했잖아. 에이키 줄 선물도 준비했고 무엇보다 에이키에게 설명도 없이 그냥 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히나타는 절대 에이키 핑계를 대며 제 목적을 이루려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건 켄마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쇼요는 그저 모른 척 해주는 정도의 방관자였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저 말은 히나타 진심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어서 켄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파티…해도 돼?”

그리고 제 눈치를 보며 고개를 드는 에이키에게서 이미 켄마의 대답은 말로 표현되지 않아도 결정되어 있었다. 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키, 벌써 크리스마스 나무 밑에 선물들 생겼는데 구경할래? 물론 아직은 뜯으면 안 되지만 우리 뭐가 들었을지 수수께끼 놀이 할까?”

히나타가 얼른 쪼그려 앉아 에이키와 눈을 맞췄다. 전 같으면 하고 싶다면서 팔짝 뛰었을 아이지만 오늘따라 에이키는 켄마의 눈치를 살폈다. “해도 돼?” 그렇게 또 허락을 구하는 질문에 켄마는 부드럽게 웃었다. “에이키를 위한 파티니까 에이키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괜찮아.” 그 이야기를 듣고서야 에이키는 “응…. 할래.”라고 말하며 히나타의 손을 잡았다.

히나타가 에이키와 놀아주는 사이, 옷을 걸고 온 켄마는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하다 말았던 것을 치우려고 했지만 거긴 이미 깨끗했다. 야쿠 군이 치웠나. 그렇게 생각하며 켄마는 그럼 때가 좀 늦긴 했으니 케이크로 일단 밥을 먹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케이크 상자만 있어야하는 냉장고 안에는 다른 상자도 하나 더 놓여있었다. 그 상자를 열자 애플파이 한 판이 있었다. 냉장고에서 많이 식었지만 단 사과 향이 켄마의 코를 간지럽혔다. 실로 오랜만의, 그것도 꽤 괜찮은 애플파이였다. 야쿠는 계속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이 집 뒷정리를 누가 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켄마는 파이 상자를 닫고 케이크를 꺼냈다.

“켄마, 내일 시간 돼…?”

켄마는 케이크를 자르다가 야쿠를 보았다. 야쿠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상태였다. 심호흡을 하더니 켄마를 보고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먼저 말했다.

“네게 말도 없이 내 멋대로 일을 진행시켜서 미안하다.”

그리고 그 사과에 켄마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카아시는 내게 사과하지 않던데.”

켄마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케이크로 눈을 돌려 케이크를 마저 잘랐다.

냉장고에 있어서인지 케이크가 잘리면서 약간 서걱거렸다. 미리 준비한 접시에 한 조각 덜어내고 켄마는 다시 칼을 들었다.

“그리고 이상한 말을 했어.”

“…무슨 말?”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다른 접시에 또 한 조각을 덜어냈다. 총 접시 네 개에 한 조각씩 케이크를 덜어내고 나서야 켄마는 플라스틱 칼을 내려놓았다. 다시 케이크 상자에 남은 케이크를 집어 놓고 물어보았다.

“몇 시?”

“…오후 세 시쯤?”

“어디서?”

“여기로 오겠대.”

“…그래, 그렇구나.”

켄마가 상자를 냉장고에 고이 넣었다. 야쿠는 고개를 돌려 리스가 둘러진 고무나무 밑에서 상자를 흔들고 상자에 귀를 대보는 에이키와 그런 에이키를 구경하는 히나타를 불렀다. “케이크 먹고 하자. 배 많이 고프지?” 그러자 히나타가 에이키를 안아들고 얼른 식탁으로 모였다.

“아빠.”

켄마 근처로 오자마자 에이키는 히나타에게서 벗어나 얼른 켄마에게 달라붙었다. “오늘 따라 에이키는 아기네.” 히나타가 그렇게 말해도 에이키는 요지부동이었다. 충격이 컸던 걸까. 히나타는 그렇게 가만히 에이키를 짐작하고 그 이상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야쿠도 그랬다.

한참을 그렇게 놀고 손님들이 다 가고 나서도 에이키는 어딘가 오늘따라 기운이 영 없어보였다. 켄마는 설거지를 마치고 조심스레 에이키 옆에 앉았다. TV에는 요즘 에이키가 빠져있는 다른 만화가 한창이었다. 크리스마스 특집인 모양이었다. 켄마는 지은 죄가 있어 에이키의 머리만 쓰다듬었다.

“아빠, 오늘도 바빠?”

“아니, 오늘 내일 에이키랑 놀려고 일 다 끝냈지.”

“그럼 오늘 에이키랑 같이 자도 돼요?”

“응, 많이 피곤해? 지금 자고 싶어?”

“…그럼 에이키 안아서 같이 자도 돼요?”

“그렇게 할까?”

그렇게 말하고 켄마는 팔을 벌렸다. 에이키가 얼른 그 품에 안겼다. 켄마의 목에 제 팔들을 걸었다. 에이키 엉덩이를 받치고 켄마가 힘을 줘서 일어났다. 켄마는 오랜만에 작업실이 아니라 침실로 바로 들어갔다. 침대에 에이키를 놓아두고 그 옆에 같이 누워 에이키와 함께 이불을 덮었다. 에이키를 토닥여주자 에이키가 그런 켄마의 손을 꼭 잡았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데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몰라 켄마는 그냥 기다려줄 수밖에 없었다.

“아빠, 있잖아요.”

“응.”

“아빠는 에이키 싫어해?”

그 말에 켄마는 불을 켜고 싶었다. 무슨 표정을 지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꾹 참고 켄마는 대신 에이키를 품에 꼭 안았다. 심장 뛰는 소리를 들려주며 대답했다.

“아니, 엄청 좋아해.”

“에, 에이키가 나쁜 아이라도?”

왜 네가 나쁜 아이야. 너는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켄마는 가슴이 아리기 시작했다. 늘 나쁜 아이라고 생각하면서 자랐던 켄마에게, 늘 예쁜 아이였던 에이키가 그렇게 말하니까 괜스레 눈물이 또 나는 것 같았다.

“에이키는 나쁜 아이는 아니지만 나쁜 아이여도 좋아. 에이키니까.”

그래서 켄마는 솔직하게 말했다. 에이키는 착하든 나쁘든 언제나 에이키니까 좋아했고 좋아할 거였다. 그 말에 에이키가 “진짜?”라고 물어보았고 켄마는 “진짜, 정말.” 두 개를 붙여 강조해주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어?”

타이밍을 재고 재서 겨우 물어본 질문에 에이키는 싱겁게 대답했다.

“그냥….”

크리스마스라서 그런 걸까. 착한 아이 나쁜 아이? 켄마는 일단은 그렇게 넘기기로 하고 꼭 안아준 채로 에이키가 잠들 때까지 사랑한다고 말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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