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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켄]봄 눈 시린 8 본문

ㄴ쿠로켄

[쿠로켄]봄 눈 시린 8

2017. 10. 8. 04:13




“엑, 요즘 쿠로오 씨, 또 몸이 아픈 거예요?”

벌써 저 말만 오늘 하루에도 5번째 듣고 있는 말이었다. 쿠로오는 그 질문에 이제는 더 이상 억지웃음도 지을 수 없었다. 눈 밑은 퀭했고 기껏 끌어올렸던 컨디션도 다시 갉아 먹히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네, 그렇네요. 겨우 그렇게 말하고 눈을 끔뻑이면 다들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도 시합, 잘 보고 있어요.”

하하, 네. 경기가 계속 주말마다 이어지는 것도 한 몫 했지만 사실 다른 이유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한 채 쿠로오는 그냥 그렇게 어설피 넘겼다. 또 커피를 마시며 쿠로오는 하품을 꾹 삼켰다.

테츠, 우리 집에 언제 놀러올 거야?

“흐어~!”

“힉? 쿠, 쿠로오 선배?”

많이 아프냐고 걱정하는 히나타의 목소리에도 쿠로오는 앓는 소리만 냈다. 잠시 눈을 도륵도륵 굴리던 히나타가 제 서랍을 열어서 얼른 초콜릿을 넘겼다. 그리고 눈을 반짝였다. 당이 떨어져서 그런 거 아닌데요. 그러나 이번에도 쿠로오는 그렇게 모질게 끊어낼 수 없었다.

“…잘 먹을게.”

히나타는 그 말에 활짝 웃으며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저런 점은 어쩌면 에이키를 닮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은 반대겠지만. 에이키가 히나타를 닮았을 것이다. 자주 놀아준 사람 목록에서 ‘쇼- 씨’는 빠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잠시 그 생각에 쿠로오는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가늘어졌다. 이런 것도 싫다고 생각해버리는 자신이 좀 꼴사나웠기 때문이었다.

“에이키가 쿠로오 선배를 엄청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런 말에 괜히 기분 좋아지는 것도 좀 꼴사나웠다…. “그래?” 그렇게 말하면서 쿠로오는 괜히 제 턱 쪽에 손을 펼쳐서 입가를 가렸다.

“요즘 내내 쿠로오 선배 이야기하면서 집에 언제 놀러오냐고 하던데요.”

쿠로오가 가슴을 내리쳤다. 허둥대는 히나타를 보면서 ‘아마도 이 아이는 아무 생각 없이 말했겠지.’라고 생각하면서 건네주는 물도 감사히 받았다.

“그거 때문에 곤란해.”

“…그렇죠.”

“환청이 들릴 정도야.”

“네?”

“…요즘 전화하면 계속 그 이야기거든….”

그렇게 말하자 히나타가 알겠다는 눈치를 보였다. 그 눈은 과연 환청이 들릴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도 알겠다는 눈빛이기도 했다. 쿠로오는 그제야 힘이 들어가지지 않는, 진심의 미소를 지으며 미간을 살풋 찌푸렸다.

“내가 누군지 모르니까 그렇게 말하겠지.”

“…말하지 않아도 에이키는 쿠로오 선배를 좋아하는 걸요.”

쿠로오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히나타도 그렇게 말해놓고 고개를 숙였다. 곤란한 이야기에 잠시 둘은 말을 잇지 못했다. 서로 눈치만 살피다가 쿠로오가 먼저 어설피 웃으며 일 이야기를 꺼냈다.



“너 말이야. 계속 그렇게 어설프게 있지 말고 결정해.”

그리고 점심시간에 만난 야쿠는 겨우 넘겼던 그 이야기를 또 꺼냈다. 이쯤 되자 쿠로오도 저도 모르게 표정이 일그러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너 말고 에이키를 보고 싶었어.”

“어차피 만나도 계속 언제 집에 놀러올 거냐는 말만 들을 거잖아.”

그리고 애초에 오늘은 못 만난다고 에이키에게 차였으면서.

야쿠의 연속 어퍼컷에 쿠로오는 결국 “너 진짜 성격 나빠졌다.”라고 외쳤다. 가게 안의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야쿠는 자기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쯧 혀만 차고 고개를 저었다.

“이 주변 유치원에는 이래저래 마음에 들지 않나봐.”

“…어떤 점이?”

“뭐…시설이 마음에 들면 좀 멀고, 가까우면 교육 커리큘럼이 마음에 안 들거나 둘 다 마음에 들면 금액이…비싸거나 그런 문제이지 않을까?”

“어렵네.”

“그러니까 오늘 못 봤다고 서운해 하지 말라고.”

애초에 서운해 하진 않았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쿠로오의 대답은 영 시원찮았다. 확실히 요즘 유치원은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았다. 자기가 다닐 땐 그냥 어머니가 넣어주니까 다녔다는 느낌이었는데. 역시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쿠로오는 제 부모님을 떠올리고…지금 엄청 고생하고 있을 켄마를 떠올렸다.

“그래서 다시 논점으로 돌아와서 말인데….”

“…응.”

“그래서 언제까지 고민만 할 거야?”

이번의 야쿠의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아있었다. 쿠로오는 그런 야쿠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바보 같겠지만 아직 잘 모르겠다.” 그렇게 말하고도 괜히 찔려서 숙인 고개를 들지 않고 가만히 있는 쿠로오에게 야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이해해.”

이해한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쿠로오는 어깨가 처졌다. 조용히 음식을 입에 가져다대고 몇 번 꼭꼭 씹어 삼키기 전까지, 쿠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화 낼 줄 알았는데.”

“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애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라도 좀 쇼크지 않겠냐? 그런 면에선 켄마가 잘못한 게 맞지.”

그렇게 말하고 야쿠는 된장국을 마셨다. 그리고 쿠로오를 빤히 보다가 웃음을 흘렸다. 켄마의 잘못을 이야기했더니 어딘가 더 풀이 죽은 것 같기도 하고 반박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 쿠로오의 눈이 참 여전하다 싶었다.

“그렇다고 너마저도 멈춰있을 순 없잖아.”

“…….”

“아예 모르는 채로 살 생각 아니면 언젠가는 켄마와 말해야 돼.”

그 말에 쿠로오는 밥을 잘 먹다 말고 목 뒤를 긁었다. 응. 그래야지. 그렇게 웅얼웅얼 대답하고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한숨을 푹 쉬고는.

“켄마가 나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을 거라서 겁이 나.”

“…….”

“아무 이유 없이 숨길 사람은 아니잖아. 분명 내게….”

“별 이유가 아닐 수도 있잖아. 갑자기 네게 책임지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그냥 이냥저냥 하다 보니…둘이서 살아보니 나쁘지 않고 하니까 그렇겠지.”

“…만약 그렇다고 해도, 과연 내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려는 건 좋은 걸까? 나는 솔직히 자신 없어. 어찌되었든 나는 한번 거절당한 사람이잖아.”

으음. 야쿠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미간의 주름만 보아도 꽤 야쿠도 고전하는 주제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야쿠는 한편으로는 놀랐다. 당연히 쿠로오, 본인의 커리어나 쓸데없는 소문, 가십을 떠올릴 줄 알았는데 정작 쿠로오는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오로지 켄마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였다. 쿠로오도 이 부분을 모르는 건 아닐 것이다. 옆에서 지켜본 야쿠의 추측 중에서도 ‘켄마가 굳이 쿠로오를 찾아가지 않은 건 굳이 쿠로오의 커리어를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가설이 가장 정설 같을 정도였다. 안 그래도 옛날부터 책임감은 강하고 상냥한 사람이니, 분명 쿠로오 애가 아닌, 다른 사람 애를 데리고 가도 책임지겠다고 말할 사람이니까.

분명 그 생각에서 더 나아가서 ‘나는 어쩌면 의지되지 않는 걸까.’라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겠지. …어떤 면에선 둘 다 삽질 중일지도. 야쿠는 그 말은 굳이 꺼내지 않고 다시 삼켜 마음속에 고이 보관해두었다.

“개인적으로는 올해 안에 만나길 바라는데.”

“올해라고 해봤자 벌써 12월이라고.”

“그러니까 올해지. 내년부턴 에이키도 바빠. 유치원에 다닐 거고 켄마가 계속 같이 다닐 거야. 유치원이 지나고 초등학생이 되면, 아니 더 큰 후에 그 때는 너를 어떻게 생각할 거 같아?”

“…계속 친구로만 남을 수는 없다는 거지?”

“거기다가 켄마와 네 애니까. 아마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만 되어도 네가 누군지 스스로 어림짐작할걸. 그게 더 배신감 들지 않겠어?”

그 말에 쿠로오는 앓는 소리를 냈다. 너무 비약하지 않았느냐고 말할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확실히 에이키는 눈치가 빨랐다. 곧 말해주지 않으려고 해도 스스로 글을 읽고 추론하는 단계가 높아지면 곧 눈치 챌 문제였다.

“거기다가 에이키, 솔직히 네 판박이라고.”

앞으로 크면서는 어쩔지 모르겠지만 아기 때부터 딱 표가 난 유전자가 갑자기 켄마 쪽으로 흐를 리도 없고요? 굳이 마지막 말을 덧붙여야 했었나 싶었지만 쿠로오는 표정을 잔뜩 찡그리고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너 지금 이 상황이 그냥 재밌어 보이지.”

“너무하네. 걱정해준 친구에게.”

혀를 낼름 내밀고 일부러 장난을 치던 야쿠는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그러면서 코에서는 저도 모르게 깊은 숨이 푹 빠져나왔다. 어떻게든 무거운 공기를 가볍게 만들어보려던 초등학교 교사의 노력은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진심이야.”

그 말에 쿠로오가 씩 웃었다. “알아.” 그리고는 머리를 잠시 긁다가 말을 이었다. “그냥 워낙…힘든 이야기잖아. 너도 알다시피.” 야쿠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담담하게 한번 더 쿠로오에게 충고했다.

“그래도 되도록 빨리 결정하는 게 좋을 거야.”

켄마도 그렇고 에이키도 상처 받기 전에. 야쿠의 뒷말은 쿠로오의 된장국에 빠져서 같이 호로록 삼켜졌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된장국이 어딘가 좀 씁쓸한 맛이었다. 꼭 멸치 가루가 입 안에 텁텁하게 머무는 느낌이었다.


켄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아침이었다. 날이 가면 갈수록 그 날의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쿠로오는 몸을 부르르 떨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등받이에 등이 아닌, 제 팔과 어깨 한 쪽을 기대며 얼굴을 기울이고 눈을 감았다. 이불 안에 있는데도 발끝이 계속 시려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발을 꼼질꼼질 움직이며 쿠로오는 그 날의 아침을 떠올렸다. 좋아하던 감정들이 폭발하다 못해 자꾸 들뜨게 되어서 주체를 못하던 그 날 아침.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서, 그리고 제대로 사과하고 고백하기 위해서 정처 없이 달리다가 발견한 가게에서 애플파이를 한 판 사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던 그 길. 그 시간. 방에 혼자 남아 있다가 눈을 떴던 켄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쿠로오는 무서웠다. 무서우면서도 궁금했다. 궁금하면서도 물어보는 순간 자신의 밑바닥이 다 드러나고 정말로 버림받을까봐 무서웠다. 에이키의 손을 잡으면서도 가끔은 그 손이 버거울 때가 있었다. 오늘은 에이키에게 딱 잘라 거절해야지. 쿠로오는 그렇게 생각하며 주먹을 쥐었다.

“테츠, 우리 집 놀러 와아!”

그러나 에이키는 특유의 어린이 감성으로 만나자마자 환히 웃으며 두 팔을 벌리고 뛰어왔다. 이젠 이 문장이 인사말이 되었구나. 쿠로오는 질린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달려오는 에이키를 안아주었다. 안 돼. 그렇게 말해야하는데 이상하게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테츠, 맞아. 나 만들어써.”

“응? 뭘?”

“잠깐만.”

쿠로오가 한 손으로 아이의 엉덩이를 받치고 가만히 아이를 기다려주자 아이가 슬금슬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구겨진 종이를 보자마자 아이가 입을 비쭉 내밀었다.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쿠로오가 받아가자 아이가 이제 와서 수줍은지 꼬옥 어깨를 붙잡았다.

“앉아서 볼까?”

그러자 어깨에 얼굴을 묻은 에이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가슴께에 느껴졌다. 이젠 너무 자주 앉아서 늘 이 시간이면 비어있는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종이를 바라본 쿠로오는 잠시 눈을 찌푸렸다가 다시 크게 떠보기도 하며 그 종이를 계속 바라보았다. 결국 한참을 망설이던 쿠로오는 에이키의 등을 토닥였다. “에이키.” 그러자 가슴께에 옷이 비벼지는 소리가 나더니 정전기로 머리가 살짝 뜬 에이키가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편지…지?”

읽을 수 있는 건 가장 위에 ‘테츠’라고 적힌 제 이름뿐이었다. 나머지는 어떤 건 뒤집혀 있기도 했고 아예 글자인지 의심스러웠다. 그래도 아래는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알 수 있었다. 검은 머리의 사람이 셋이었다.

“…웅.”

에이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쿠로오는 잘 모르겠다는 말을 어떻게 돌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에이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가 쿠로오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 초대장도 줘쓰니까 올 거지?”

초대장이었구나. 쿠로오는 그 말을 듣고서야 이 편지의 주제와 내용과 그리고 밑의 삽화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작은 사람과 큰 사람에게 좀 더 떨어진 큰 사람. 그 큰 사람이 본인일 것이다. 쿠로오는 그 큰 사람을 엄지로 살짝 훑으며 “이게 나지?” 라고 물어보았다. 에이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쪽이 쿠로오고- 저쪽이 켄마. 내가 여기.” 에이키는 알아봐준 게 즐거운지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이제 그래서 올 거야?”

“하하…. 누가 초대장 주면 올 수 있다고 말했어?”

“으음…. 신데렐라가.”

“신데렐라구나.”

쿠로오는 그렇게 말해놓고 보니 꼭 틀린 표현도 아닐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신데렐라가 한번만이라도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성이 딱 지금 코즈메 가였다. 평소에는 갈 수 없는 곳. 허락받은 사람들만 드나들 수 있는 곳.

“이제 초대장도 있으니까 올 거지?”

“으음. 글쎄요.”

“왜에! 맨날 테츠는 안 된다고만 하고. 심술쟁이야.”

콩콩 작은 손이 내려치는 건 아프지 않은데도 아팠다. 쿠로오는 끙 또 앓았다. 거절하지 못하니까 더 마음이 아팠다. 그래, 에이키에게 지금까지 계속 단호하게 끊어내지 못한 건 사실 쿠로오 책임도 있었다. 늘 오늘은 말해야지하면서도 결국 말하지 못하는 건 왠지 그 핑계로 한번 만나고 싶다고 생각해서겠지. 쿠로오는 이를 앙다물고 숨을 한번 크게 내쉬었다.

“…아버지가 힘들어하시면 어떡하려고.”

아니, 그냥 거절해야 했는데. 거기서 왜 또 핑계를 대냐고. 쿠로오는 제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굳이 그걸 에이키에게 할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에이키도 멍하니 쿠로오를 바라보다가 눈을 깜빡였다. “왜 힘들어 해?” 역시나 에이키는 그 질문을 되물었다. 쿠로오는 숨이 턱턱 막혀오기 시작했다. 그냥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손…님이 갑자기 오면 손님 준비도 해야 하고 힘들잖아.”

“으…웅…?”

에이키가 제 턱에 손을 올리고 고민했다. 고개를 기울이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해내려는 폼이 꼭 얼마 살지도 않은 과거를 회상하는 것만 같았다.

“그럼 켄마에게 전화해보까?”

“뭐?”

“잠깐만~.”

“아니, 잠깐만, 잠깐만요. 스톱!”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을 느끼며 쿠로오는 다급하게 에이키의 손목을 잡았다. 아직 얇디얇은 손목은 너무 얇아서 한손으로 잡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어깨도 바르르 떨려서 거의 얼굴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에이키는 입술을 조금 내밀고 고개를 기울이며 눈 가득 물음표를 띄우고 있었다.

“왜엥? 전화해서 물어보면 되지.”

“아니, 그렇다고 지금 전화하는 건 아니지!”

아직 그렇게까지 거리감을 좁힐 생각은 없었다고! 이 바보 아들 녀석아. 그렇게 말했다가도 또 머리를 쿵 박아버리고 싶었다. 아, 이런 행동력은 진짜 누굴 닮았어. 누굴 닮았겠어. 나 아니면 켄마겠지. 아악! 고통스러워하는 쿠로오를 재밌게 바라보던 에이키가 피식 웃었다.

“그럼 올 거지? 크리스마스에 올 거지?”

“또 왜 이야기가 그렇게 돼…?”

“초대장에 적었잖아. 크리스마스에 초대한다구.”

응, 그런 내용 전혀 몰랐는데. 쿠로오는 결국 인상을 쓴 채로 웃었다. 우기는 솜씨하곤. 여기서 이기는 건 결국 글을 모르는 에이키다. 쿠로오는 고개를 숙였다. 이마를 손으로 겨우 받친 채로 한숨을 거나하게 쉬었다.

“크리스마스에…케이크도 먹을 거고, 쇼 씨도 야쿠 씨도 아카아시 씨도 오고 다들 선물 주기로 했는데 안 올 거야?”

“이상하네. 산타 할아버지는 착한 아이에게만 선물 줄 텐데.”

“에이키, 착한 아이 맞아! 아빠 일도 가만히 잘 기다리니까!”

그리고 지금 맨날 바쁜 테츠하고도 같이 놀려구 열심히 말하는 거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가슴을 짝 피고 당당하게 옆구리에 손을 턱 올리는데 과연 그렇게 따지면 그렇긴 했다. 쿠로오는 또 한숨을 쉬었다. 이젠 아예 벤치 뒤로 몸을 넘기고는 젖혀진 얼굴 위로 제 두 손을 포갰다. 죽을 듯한 목소리로

“…크리스마스는 안 돼.”

화요일은 주간회의 있으니까….

라고 말했다. 그 말에 에이키가 눈을 반짝였다. “그럼 그 전날에 하까? 아카아시 씨가 그랬어! 크리스마스 전날은…음, 음 그 날부터 노는 거라고!” 뭔가 이상하게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일단 쿠로오는 그런 거 하나하나 뜯어 고쳐줄 여유가 없었다. 한숨을 벌써 몇 번이나 쉬니 이젠 허탈한 웃음만 나왔다. 여름부터. 여름부터 쿠로오 등을 떠미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더니 결국 제 아들에게는 손이 잡혀 질질 끌려가는 꼴이 되었다.






그 날 이후로 잠잠해질 줄 알았던 에이키의 부산스러움은 이상하게도 집에 놀러오라고 했던 그 정도, 아니 가끔은 그 이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테츠테츠, 우리 이브 날에- 케이크 먹자, 케이크!

테츠는 혹시 폴리레인저(요즘 새로 빠져있는 만화) 봤어? 그거 같이 봐!

테츠랑 케이크 먹고 배구 하고 싶다! 밖은 추우니까 집에서 하게 해달라고 테츠랑 나랑 말하면 켄마도 괜찮다고 해주지 않을까?

음-, 테츠는 스케이트 타봤어? 나, 나 스케이트 타보고 싶어!

우리 밤새서 산타 할아버지 볼래? 산타 할아버지 보고 싶어.

목장 가고 싶다! 물고기도 보고 싶어!

“요즘 에이키, 혹시 말 배울 시기입니까…? 히나타 씨?”

“으…음. 원래 에이키가 행사 같은 것에 좀 약해…서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히나타는 차마 쿠로오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괜히 쪼물쪼물 제 손가락을 만지고 주무르기만 했다. “엄청 들뜨는 타입이구나.” 그렇게 말했더니 히나타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한번은 켄마에게 일이 있어서 저랑 미야기에 같이 내려갔던 적이 있는데…. 미야기 내려가는 내내 기차에서 엄-청 이야기 들었어요. 쿠로오는 그 말이 어떤 뜻인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다가 곧 눈을 뜨고 히나타를 째려봤다.

“에이키 데리고 내려갔다고…?”

“엣, 아니, 켄마가 아픈데 켄마네 부모님도 힘드실 때라 제가 대신 돌봤던 적이 있어서요.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래…?”

“그, 그, 그래서 이브에 오시는 거예요? 선물은 정하셨어요?”

어떻게든 말을 돌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가상하여 쿠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보는 만화의 레스큐 로봇 주문했어.” 그러자 히나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그런데 에이키가 좋아하는 건 다른 거였지 않나요?”

“그건 켄마가 사줄 거니까. 나는 친구를 사줘야지.”

“아, 역시 쿠로오 선배네요. 뭔가 되게 잘 아시는 것 같아요.”

그러고는 히나타는 잠시 저도 뭘 선물할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저는 고민해봤는데 아마 모구모구 쿠션을 사게 될 거 같아요. 이번에 베개로 쓸 수 있을 정도로 좀 큰 쿠션이 있더라구요.” 그러면서 관련 물품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쿠로오는 그걸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보였다.

“그래서 말인데…. 이브에….”

“네.”

“…켄마…선물도 사려고 하는데.”

그 말과 동시에 히나타가 제 손에서 폰을 놓쳤다. 바닥에 박살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고 히나타가 작게 비명을 지르는 소리도 연달아 터져 나왔다. 쿠로오도 당황해서 주워 올리려하자 히나타가 얼른 몸을 낮춰 줍고는 “괜, 괜찮아요! 안 깨졌어요!”라고 말했다.

“어…음, 선물…, 어떤 거 사시려구요?”

“무…난하게 애플파이…같은 걸…사려고 하는데…….”

“애플파이…. 음…. 그러고 보니 켄마가 최근에는 애플파이를 먹는 걸 못 봤던 거 같아요. 에이키는 파이보단 케이크를 좋아해서.”

“…그래?”

“그, 그래도 아직 좋아할 거예요! 분명 오랜만이니까 더 좋아할 거예요.”

열심히 부연설명을 붙이는 히나타의 목소리엔 자신감은 하나도 없었다. 마치 팀에 들어오고 신인 소개 관련 인터뷰를 했을 때와 똑같은 반응이었다. 켄마가 좋아하는 게 애플파이였는데, 애플파이만 있으면 가끔 모른 척 내 응석도 받아주곤 했었는데. 그런 켄마가 좋아하는 것 하나가 지워지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물론 예전의 켄마는 케이크도 좋아했지만….

히나타도 켄마에 대해서 잘 모르는구나.

그리고 은근히 그런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감이라고 말하기에는 쿠로오 본인도 지금의 켄마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고 질투로 인한 안도감이라고 하기엔 또 뭔가 껄끄러운 부분이 있었다. 뭘까. 이 감정은. 쿠로오는 일단 그걸 넘겨두기로 했다. 그 때만 해도 사소한 거라고 생각했다.

-어…, 켄마가 좋아하는 거? 글쎄…. 이제 게임도 안 하고….

-음…. 글쎄요? 코즈메는 에이키가 좋아하는 거면 좋아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점점 사소한 게 아닌 것 같았다. 주변 사람들 모두 에이키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코즈메 켄마에 대해서는 좋아하는 것조차도 잘 모르겠다는 답이 많았다. 어째서일까. 쿠로오는 옛날의 코즈메 켄마를 떠올렸다. 단 걸 좋아하고 게임기를 늘 들고 다니던 사람. 밥 대신 가끔 사과를 먹고 오기도 했고 배구는 싫어하진 않지만 좋아하지도 않았다. 가끔 몸이 힘들면 슬쩍 핑계를 대고 끌고 나와 그늘에 앉아서 둘이서 잠시 쉬다 가기도 했었는데. 과일 종류는 다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수박이나 귤 같은 걸 오물오물 먹는 게 귀여웠다. 마시는 것도 코코아. 가끔 손을 잡으면 볼이 살짝 상기되곤 했던…. 어…. 어쨌든 그 외에도 켄마가 사소하게 좋아하는 시간이나 장소나 세세한 걸 다 알고 있었는데 왜 지금은 그렇게 아는 사람이 없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사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소하게 넘겼지만 계속 커져가던 그 감정이 무엇인지도 알아냈다. 그립고 안타까운 기분이었다.

“켄마가 좋아하는 거?”

에이키가 하늘에서 떨어지던 공을 잡고 고개를 옆으로 눕혔다. 아이에게 뭘 묻냐 싶었지만 그래도 에이키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에이키도 고개가 기울어지는 걸 보고 쿠로오는 쓰게 웃었다.

“켄마는 쿠로 좋아해-.”

쿠로오는 잠시 숨을 못 쉬었다.

그 ‘쿠로’가 아닌데도 하마터면 또 아이 앞에서 울 뻔 했다.

“켄마는 검정색 좋아해. 쿠로모구도 좋다고 했고 또, 음, 앞치마도 검정색이고 그리고…응, 켄마가 편지 쓰는 다이어리도 검정색인걸!”

“편…지?”

“응, 매일매일 쓰는 거래. 나중에 나 주기로 했어.”

“매일매일 쓰는 거면 ‘일기’는 아니고?”

“일기는 뭐야?”

일기에 대해 설명하다가도 쿠로오는 에이키를 바라보았다. 에이키가 네 살. 내년 4월엔 유치원에 가는 나이. 관찰일기도 쓰기 귀찮아서 항상 늘 쿠로오와 똑같은 걸 선택해서 방학이 끝나갈 때 베껴가던 켄마가 매일매일 육아일기를 써왔다니. 점점 더 켄마가 ‘모르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에 그리워지면서도 어딘가 쓸쓸해지고 있었다. 내가 아는 켄마에 집착한다기보다는…. 그냥 쓸쓸했다. 쿠로오가 손을 모아서 공을 하늘로 밀어냈다. 다시 에이키에게로 공이 날아갔다. 팔짝팔짝 뛰며 공을 가만히 바라보는 눈에 햇볕이 닿아 반짝거렸다. 그 눈이 반짝여서 쿠로오는 또 그 사람을 떠올렸다. 여름에 잠깐 보았던 켄마의 눈도 반짝이고 있었다.

“빨리 크리스마스 왔으면 좋겠다! 그치?”

무섭지만 이상하게도, 날이 다가올수록 켄마가 보고 싶었다.

“응.”

나도 그래.

역시 켄마의 선물은 애플파이를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쿠로오는 다시 자기에게로 날아오는 공을 받기 위해 몸을 낮췄다. 에이키가 좋아하는 건 에이키 선물이고, 나는 너를 어쨌든 만나는 거니까 네가 좋아하는 걸 사야겠지.

“뭐하고 놀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

아마 그렇게 놀지 못할 것 같지만. 쫓겨나거나 파티가 끝나거나, 혹은 최악이면 켄마가 쓰러지는 것도 있을 수 있겠지만 쿠로오는 그래도 가고 싶었다. 가야만 했다. 어쨌든 지금까지 ‘테츠’라고 불린 그 친구가 자신이었다는 걸 더 이상 숨기는 건 안 되는 이야기였고…. 조금…. 정말 조금이지만 사심을 담아…. 아직 나는 너를….

“켄마도 얼른 테츠가 놀러왔으면 좋겠대.”

“…그래?”

“응, 항상 같이 노는 친구 보고 싶댔어! 그래서 요즘, 아빠 열심히 일 해. 그래야 같이 놀 수 있다고. 조금 심심하지만 같이 놀 거니까!”

“응, 그래.”

심심하면 전화해. 나도 요즘 바쁘지만 노력할게. 쿠로오의 말에 에이키가 웃었다. “테츠는 꼭 아빠 같아.” 쿠로오는 그냥 말갛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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