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업하는 닛
[쿠로켄]봄 눈 시린 5 본문
“켄마아.”
“일어났어?”
아까 전까지 도마를 두드리던 소리가 잠시 멈추고 켄마는 뒤를 돌았다. 에이키가 품에 공 하나를 꼭 안고 아직 눈도 다 못 뜬 채로 비틀비틀 주방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켄마 다리를 꼭 잡고 매달리는 게 일상이었는데 오늘은 공을 품에 안고 있어서 그냥 켄마의 엉덩이에 제 이마를 콩 찧고는 다시 발길을 돌려 거실로 휘적휘적 걸었다. “오늘 뭐먹허?” 에이키의 질문에 켄마는 잠시 고개를 기울이고는 “에이키 좋아하는 생선 먹을까?”라고 물었다.
“응, 고등어 먹을래.”
“고등어 그럼 구워야겠네.”
이미 다 꺼내놓았으면서도 켄마는 그렇게 천연덕스레 대답했다. “다 되는 동안 TV보고 있어.” 그렇게 말하자마자 에이키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빠, 있잖아요-.”
“안 돼.”
“에엑,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집에서 공 가지고 논다는 말 하려고 하는 거 아냐?”
에이키가 얼른 입술을 비쭉 내민다. 그걸 굳이 등을 돌려 보지 않아도 켄마는 알 수 있었다. “공놀이, 집에서 하면 다칠 수 있어서 안 돼.” 켄마는 아까 낮잠 자기 전에도 에이키에게 일러준 말을 그대로 또 반복했다. 에이키도 알고 있으면서도 물어본 게 뻔했을 텐데도 저렇게 안 된다는 말을 할 때마다 시무룩해하니 켄마 입장에서는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까짓 거 한 번 다 치워주고 공놀이 하라고 할까 싶다가도 형광등이나 그런 건 어떻게 치울 수가 없으니 역시 무리고…. 그렇다고 자꾸 안 된다는 말만 하기에는 저렇게까지 공놀이를 하고 싶어 하는데 무슨 다른 대책이라도 없을까 싶은 게 요즘 켄마의 고민이었다. “얌전히 잘 할 수 있는데….” 에이키가 그렇게 주장해도 켄마는 그 부분에 있어서는 전혀 신뢰할 수 없었다.
“그래도 집에서는 안 돼.”
“켄마는 심술쟁이야.”
“그렇게 말해도 안 돼.”
“이잉….”
소파에서 주르륵 미끄러지는 에이키는 볼을 부풀려서 켄마를 치켜뜨며 봤다. 하지만 켄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곧 고등어 냄새에 에이키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고등어 굽는 거 볼래!” 별로 재미없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켄마는 불을 좀 낮추고 달려오는 에이키를 안아 조금 떨어져서 고등어가 익는 걸 보여주었다. 그리고 내려주자 에이키는 조금 기분이 풀린 모양인지 얼른 식탁 제 자리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공을 꼭 끌어안았다. “오늘 따라 공이 더 좋아?” 켄마가 그렇게 물어보며 접시에 고등어를 옮겼다.
“응!”
“뭐하고 놀았는데?”
뭘 했기에 웬일로 저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나 싶어서 물어본 질문에 에이키가 신이 나서 쫑알쫑알 의자에 무릎을 세우고 일어나선 켄마를 보며 대답했다. “배구!” 그 말에 켄마는 눈을 깜빡였다. “응?” 켄마는 자기가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배구! 배구 했어! 이렇게! 손 모아서! 공이 올라가서 내려오며언, 이걸로 다시 퉁! 위로 올리는 거, 그거 했어!”
“…그래?”
“응, 이거 그리고 배구공이래! 발로 차면 안 된대, 아빠도 몰랐지? 아까 아저씨가 이거는 이렇게! 띄우면서!”
“아저씨?”
“응!”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에이키는 아차, 하는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제 입을 슬쩍 두 손으로 막았다. “아저씨라니?” 켄마가 다시 물어보았지만 에이키는 어물어물거리더니 “켄마, 나 배고파….”라고 말을 돌렸다. 하지만 켄마는 “에이키.” 전혀 돌릴 마음이 없었다. 으응, 켄마아. 에이키는 대답하기 싫은 게 있으면 켄마에게 칭얼거렸다. 그러고도 켄마가 놔주지 않았더니 결국 입을 꾹 다문 채로 눈물방울만 뚝뚝 흘렸다.
“에이키.”
“…….”
울면서도 말하지 않을 때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에이키는 어리면서도 그런 건 고집이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땐 보통 누군가와의 약속인 경우가 컸다. 억울해서 우는 한이 있더라도 누군가와의 약속은 지키는 것 자체에는 잘못이 있는 건 아니었다. 특히 에이키처럼 아직 어린 아이들이면 더 그렇겠지. 결국 한숨을 쉬는 건 켄마였다. 공만 끌어안고 뚝뚝 소리도 죽여 가며 우는 아이의 눈가를 닦아주며, 켄마는 “알았어.”라고 말했다.
“에이키는 말 못하는 거지?”
“….”
에이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렁그렁한 눈으로 켄마를 바라보았다. 과보호를 하는 건 아니지만, 켄마는 아직도 에이키가 한 시간 정도를 혼자서 놀다온다는 게 불안했다. 자신에게 그런 유년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뉴스를 많이 보고 지레 겁을 먹은 것 때문일지도.
“나는 에이키를 믿으니까 이거에 대해선 더 안 물을게.”
그래도 켄마는 꼭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이키, 나랑 약속해. 절대로 나 말고는 다른 사람이 부르면 절대로 가지 말기. 아카아시도 야쿠 군도, 쇼요도, 리에프도 누구든 안 돼.”
“절대로?”
“절대로. 도와달라고 해도 일단 나에게 먼저 와.”
“아빠 말고 전부? 아카아시 씨나, 쇼- 씨나, 야쿠 씨도? 리에푸 씨도?”
“전부. 나한테 먼저 와야 해.”
“…그래도 쇼-씨나….”
“안 돼. 에이키가 그렇게 생각해서 그 사람이랑 같이 가면 이제 아빠랑 영영 못 만날 거야. 아빠 없이 에이키 혼자 살아야 돼.”
“시, 싫어! 시-이-러!”
결국은 에이키가 눈물을 터트리며 소리를 질렀다. 고개를 들고 와앙 울며 “안 그러께요-.” 하고 숨을 넘기는 아이를 안고 켄마는 토닥여주었다. 울면서 에이키는 켄마의 등을 꼭 붙잡았다.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마아-.” 말뿐이었는데도 엄청나게 속상했는지 에이키는 펑펑 울었다. 아빠 조아-. 다 물러진 발음으로 한참을 우는 에이키를 결국 안아 들어 달랬다. 울 걸 알면서도 켄마는 일부러 더 무섭게 말한 걸 후회하지 않았다.
결국 울음을 그친 후에야 다시 식탁을 마저 차렸다. 우는 통에 열이 난 에이키의 이마에 시트를 붙여주고 꼼꼼하게 뼈를 발라 접시 한 쪽에 올려두면 어린이용 젓가락으로 열심히 에이키가 집어먹었다. “맛있어!” 켄마가 묻기 전에 에이키가 먼저 대답했다. 그러고는 웃었다. 원래도 에이키가 좋아하는 반찬이긴 했지만 켄마는 그 미소가 편하지만은 않았다.
“에이키, 이 닦고 와.”
“으웅.”
그래서 에이키가 양치하러 간 사이에, 켄마는 폰을 들었다. 갑자기 한 달 전부터 매번 점심시간에 찾아와서 에이키도 이제 혼자서 할 수 있다고 몰아붙인 야쿠, 언제부턴가 뭔가를 숨기는 것 같은 아카아시. 에이키가 말한 ‘아저씨’가 꼭 그들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닐 거다. 배구…는 이 나라에서 흔한 스포츠였으니까. 동네 주민이 배구공을 가지고 노는 에이키를 보고 가르쳐준 것일 수도 있는 문제였다.
묻는다면 야쿠 군이나 아카아시 쪽은 피해야겠지.
사실 별 거 아닐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불안한 느낌이 계속 들었고 켄마는 그 묘한 직감에 히나타의 연락처를 찾았다. 쇼요라고 저장된 글자가 떴다가 곧 다시 반짝였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는 히나타의 목소리가 긴박한 상황처럼 헐떡이고 있었다. “쇼요?” 켄마는 어깨를 들썩였다가 곧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곧 이유를 짐작했다.
“전화 받을 수 있어?”
-응, 무슨 일이야?
중간 중간 팡-하고 무언가가 바닥에 내려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켄마는 그 소리를 짐작할 수 있었다. 싫다. 그렇게 생각했더니 목소리가 낮아졌다.
“에이키가 만나는 ‘아저씨’를 알아?”
그러자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자세히 들어보면 어버버하면서 저기, 저기…. 같은 말의 작은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켄마는 거기서 이 아저씨는 생각보다 에이키와 제법 어울렸을 거라고 확신했다. 누구지. 켄마가 끊어버린 인연이 너무 많아서 어떤 사람일지 짐작도 못할 때가 되어서야 히나타가
-미안, 켄마.
라고 말했다. “쇼요.” 그 이름만 불렀는데도 마치 네가 나한테 이렇게 할지 몰랐다-같이 들려서 켄마도 덩달아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알고 있는 사람이야?”
-그게, 아무래도 에이키가 혼자 놀긴 그러니까 부탁드린 사람이야-라고 야쿠 씨가 그렇게 말하라고 했는데.
그 짧은 문장을 말하면서도 히나타는 긴장한 건지 말을 자꾸 더듬었다. 군말도 붙여가면서 켄마에게 뭔가를 설명하려다가 곧 숨을 한번 골랐다.
-켄마가 걱정 안 해도 돼. 정말이야.
“…지금 그거, 이상한 말인 거 알고 있지?”
-알아. 나라도 불안했을 거야. 하지만 그래서 더 솔직하게 말하고 있으니까…. 나는 켄마에게 거짓말은 안 하잖아…. 정말로 믿어줬으면 좋겠어.
나도, 에이키도. 히나타의 말에 켄마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래서 보호자에게는 말 한 마디도 없었던 거야?”
-아니…, 나는 바로 말하자는 쪽이었는데 그, 아카아시 씨가….
그렇게 말하다가 히나타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자꾸 남 탓을 하는 게 영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다시 한번 사과를 하는 히나타의 목소리 뒤로는 계속해서 호루라기 소리와 바닥을 내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
그리고 몇 번째의 사과의 뒤로 히나타를 부르는 목소리가 섞였다. 그 목소리는 꽤 낮았으며 익숙한 목소리였다. 켄마는 저도 모르게 쥐고 있던 손에 더 힘을 줬다. 건너편 사람도 당황했는지 얼른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수화기 부분을 손으로 가렸는지 부스럭대는 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쇼요.”
-어, 어?
“끊을게.”
그리고 대답도 듣지 않고 끊었다. 이번의 한숨은 켄마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기운이 다 빠진 것 같은 몰골로 스르르 식탁 의자에 다시 주저앉듯이 앉은 후, 켄마는 이마를 짚었다. 잊은 줄 알았는데. 그런데 그 어투와 목소리만으로도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는 걸 보며 켄마는 기운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직 멀었나. 머리가 다시 멍해지면서 아파졌다.
“쇼-씨야?!”
어느 정도냐면 에이키의 들뜬 목소리만으로도 골이 울리는 느낌이었다. 켄마가 고개를 들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 거기까지 뛰듯이 걸어와 식탁 모서리를 잡고 제 턱을 받쳤다. “전화 나도 바꿔주라!” 켄마가 고개를 살짝 틀어 에이키를 바라보았다. 에이키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노란 눈에 켄마가 두 명 비치고 있었다. “미안, 방금 끊어버렸어.” 어딘가 지친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하자 에이키가 “흐응….” 하고 잠시 고민하는 소리를 냈다.
“어쩔 수 없지! 어른의 사정이니까!”
“…그건 누가 말했어?”
“으음…, 아카아시 씨?”
어른은 여러 가지 일이 있다고 했으니까, 내가 이해해주께. 에이키가 가슴을 통통 치며 뿌듯해하는 모습을 보고 켄마는 눈만 끔뻑이다가 마지막 한숨을 이번엔 입이 아니라 코로 내뱉었다.
“에이키, 잠깐 앉아볼래?”
그러자 에이키가 눈을 더 또렷하게 뜨고 허둥지둥 맞은편 식탁 의자를 끌어내 먼저 공을 식탁에 올리고 곧 뒤따라 제 몸을 올렸다. 그리고 두 손으로 척 제 턱을 괴었다. 공은 아직도 품에 안겨있었다.
“좀 더 기다리까?”
에이키가 눈을 깜빡였다. 그 말에는 지겹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더 기다려야 하냐는 순수한 질문이었다. 이것도 켄마가 말한 거였다. 에이키가 고민되면 언제든 말로 표현해 줘. 그 말 이후로는 에이키는 자기가 생각해보고도 답이 나오지 않는 건 종종 말로 표현했다.
“에이키는 밖에서 노는 거, 무섭거나 하지 않아?”
“아니? 왜? 켄마는 무서워?”
“응. 에이키가 다치거나 다른 사람이 에이키를 데려갈까 봐.”
“…….”
안 그럴 건데. 아까 엄청 울었던 게 아직 잊히지 않았는지 어물어물 대답하면서 에이키는 고개를 숙였다. 턱을 괴던 손도 풀고는 공만 꼭 끌어안았다.
“그래서 에이키에게 폰을 사줄까 싶은데.”
쾅! 하는 소리에 켄마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깨를 잠시 떨었다. 손이 아프진 않을까 싶을 정도로 크게 식탁을 내려치고 번뜩 눈을 뜬 에이키의 눈에는 보석이 모이다 못해 은하수를 이루고 있었다.
“진짜?!”
“진짜.”
“야호!”
이제는 두 팔을 번쩍 들어 주먹을 쥐고 있었다. 쾅쾅. 식탁 아래서 자꾸 뭐가 부딪히는지 소음이 끊이질 않았다. 에이키의 발톱이 또 멍들어서 빠지기 전에 켄마는 일단 에이키를 진정시켜야 했다. “에이키, 조용히 해야지.” 그러자 에이키가 얼른 손을 내리고 제 입을 틀어막았다. “…다리도.” 다시 지적하자 그제야 방방 흔들던 다리를 딱 붙였다.
“오늘 사주는 거야?”
“나도 이제 그럼 막 켄마처럼 어, 어, 전화도 할 수 있어?”
“어른 같아!”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괜히 GPS 추적이 되는 것만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켄마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와, 그럼 나 막 이제 아빠처럼 사람들하고 전화하구 그래도 되지?” 에이키의 말에 켄마가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빠랑도 전화할 수 있지?” 그 말에는 결국 켄마가 대답했다. “응.” 또 에이키의 손이 하늘 높이 올라갔다.
“짜잔! 레스큐-레인저!”
에이키는 팔을 들어 보이고 포즈를 취했다. 한 바퀴 돌리고 딱 손목 부근을 붙잡으며 진지하게 부릅뜬 눈은 괜히 쿠로오가 머쓱해질 정도였다. 잠시 그렇게 멈춰 있다가 쿠로오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답을 내렸다.
“으윽, 레인저 공격에 당했다-!”
“아냐! 레인저 놀이가 아니란 마리야!”
아니었나. 쿠로오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척 무릎을 꿇었다가 그 채로 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에이키 손목에 차고 있는 걸 발견했다. “이게 뭐야?” 쿠로오의 질문에 에이키가 웃었다.
“이거 봐라~. 에이키도 이제 전화할 수 이따!”
이제 에이키도 어른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가슴을 쫙 펴는 아이를 보면서 그걸로 어른이 된다는 생각이 아직 아이라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쿠로오는 웃으면서 “와, 이거 스마트워치야?”라고 모르는 척 물어봐주었다.
“이제 나, 아빠랑- 할아버지랑 할머니한테도 전화할 수 있지롱! 쇼-씨도, 그리구 야쿠 씨도, 아카아시 씨도!”
그렇게 자랑을 하던 에이키가 다시 벤치에 앉았다. 작은 손으로 토독토독 뭔갈 누르더니 주소록을 보여주었다. 아이가 읽기 쉬우라고 히라가나로 적어놓은 이름들을 보며 쿠로오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 샀어? 어제?” 그렇게 물어보자 에이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산 거는- 벌써 어, 그, 어제어제어제-에 샀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꼽은 손가락은 4개여서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가 뭐, 별 차이 없겠구나싶어 쿠로오는 넘겨버렸다.
“근데 켄마가, 켄마 거랑 할아버지랑 할머니 거는 알려줄 수 있는데에 원래 다른 사람들은 물어보고 입력하는 거라구 해서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본다구 오래 걸렸어.”
그래서 주말이 지나고도 자랑을 못했던 모양이다. 에이키는 입을 비쭉 내밀면서 마저 말을 꺼낸다. “리에푸 씨는 나중에 알려준댔어. 치사해.” 폰이 고장 나서 바꿔야 한다면서 바꾸자마자 달려오겠다고 그렇게 아이를 달랬지만 아이는 그게 퍽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리에프와 관련한 이야기를 야쿠에게 들은 게 있어 쿠로오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래도 분명 폰 사자마자 리에프는 에이키한테 가장 먼저 달려올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말하자 에이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약속했으니까!”
“그럼 별 치사할 것도 없네 뭐.”
“응….”
그러고는 에이키도 다시 생각해보는 건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이제 다 허락받은 거야?”
“응!”
그렇게 말하다가 에이키가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응이야, 아니야?”
그런 모습을 보고 쿠로오가 웃었다. “아저씨.” 에이키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계속 미소 지은 채로 “응?”이라고 대답했다.
“아저씨도! 아저씨도 알려주면 안 돼?”
“으음….”
쿠로오가 망설이는 걸 보자마자 에이키는 얼른 쿠로오의 무릎에 손을 올리고 “응?” 하면서 올려다보았다. “에이키눈 아저씨랑 친구라구 생각해서어 그래서 아저씨랑두 전화하구 싶은데….” 턱을 당긴 자세로 눈을 좀 더 크게 뜨며 반짝반짝 바라보는 걸 보면 ‘아, 얘는 이렇게 하면 자기 소원을 들어주는 걸 아는 녀석이구나.’싶었다. 이런 건 누굴 닮은 걸까? 똑똑한 걸 생각하면 아마 …켄마를 닮았을 것이고…하지만 이렇게 처세술에 강한 건 또 자기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안 되는데.”
그리고 쿠로오는 그것보다 더 높은 경지에 있는 ‘어른’이었다. 희망을 주지 않고 딱 자르는 말에 에이키의 눈썹이 비뚜름하게 세워지고 미간에 주름이 잡히면서 입술이 비쭉 삐져나왔다.
“치-사해!”
바보! 바보! 계속 바보만 줄창 외치던 에이키의 턱에 호두알이 깊게 새겨질 때쯤엔 이제 에이키 눈가가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킁킁거리는 소리가 딱 전조 같아서 쿠로오는 한숨을 쉬고 좀 더 표정을 굳혔다.
“아저씨랑 약속했잖아. 아저씨랑 노는 건 비밀이라고.”
에이키가 들키면 이제 아저씨랑 못 만나는데 그래도 괜찮아?
그 말에 에이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입술을 꾹 깨문 채로 들썩였다. 에이키가 들었던 말들은 모두 그런 말들뿐이어서 아이의 입장에서는 속상한 것을 넘어 큰 상처로 남겨지고 있었다. 아차, 왜 폰을 사주려고 한다는 지 대강 이야기를 들은 게 있는 쿠로오는 얼른 아이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그럼 에이키가 리시브 30번 하면 알려줄까?”
에이키는 30까지 셀 수 있어?
얼른 쿠로오가 그렇게 말을 꺼내자 에이키 코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알아, 30. 10, 20, 30이지?” 에이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에이키는 똑똑하네-.” 그렇게 칭찬해주자 이젠 에이키 스스로가 먼저 눈가를 쓱쓱 비볐다. “진짜로?” 진짜로 30번만 해주면 알려줄 거냐고 물었고 쿠로오는 “진짜로.”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했다. 손가락도 내밀었다.
“진짜로!”
신이 나서 손가락을 걸고 ‘어기면 바늘 천 개 삼키기’노래까지 부른 후에도 그 흥이 꺼지지 않는지 에이키가 얼른 일어나서 공을 공중에 던졌다. 땅에 떨어져서 데구르르 구르는 공을 쫓아 웃으면서 뛰었다. 벌써 새 학기가 시작하고 가을이 되어야하는데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온도는 에이키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까르르 넘어가는 웃음소리가 쿠로오의 마음의 온도를 조금씩 높였다. “두고 봐!” 에이키가 선언했다.
“백 번도 할 거야-!”
두 팔을 벌리고 한껏 웃고 있는 그 개구쟁이 머리는 햇빛을 받아 더 칠흑같이 반짝였다. 그리고 다시 차오르는 눈은 해 같이 노랗게 반짝였다. 그러다가 다시 곱게 휘어지는 눈에, 쿠로오는 어디다 내놔도 쿠로오 아들이라는 소리를 들을 아이를 보며 따라 웃었다.
“좋아, 그럼 아직 5번 정도밖에 못하는 에이키는 특훈을 해야겠네요.”
쿠로오가 그렇게 어른답지 못하게 놀리는 것도 모두 애정에서 비롯된 거였다. 역시나 얼른 털을 곤두세우며 아기고양이처럼 하악거렸다.
“아냐! 이제 곧 할 거라고!”
“좋아, 그럼 오늘 몇 번 하는지 세어볼까?”
30. 이제 겨우 4살이 된 아이가 리시브를 30번 연속으로 한다는 건 보통 일은 아니었다. 아주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약속을 했다는 걸 야쿠나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아주 따가운 눈총을 받겠지. 그런데도 쿠로오는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아, 놓쳤다!”
“네, 그럼 다시 카운트.”
“으이이!”
이제도 겨우 네댓 번 정도 주고받지만 쿠로오는 아마 곧 30번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 몸이 따라오지 않아서 놓치는 경우가 많지만 에이키의 눈은 꽤나 날카로웠다. 언더로 받을지, 오버로 받을지 자세를 구분하는 눈은 누구를 닮은 걸까. 쿠로오는 이상하게 그게 뿌듯했다.
“다시!”
“좋죠!”
공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쿠로오는 공중에 뜬 공을 보고 슬쩍 혀를 내밀었다. 그리고 살짝 이로 물었다. 정말로 재밌는 시합을 할 때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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