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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켄]봄 눈 시린 3 본문

ㄴ쿠로켄

[쿠로켄]봄 눈 시린 3

2017. 1. 30. 02:34




켄마가 버거운 느낌에 잠에서 깨어, 눈을 뜨기도 전에 손을 뻗어 제 위로 올라온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그러자 까르르 웃는 소리가 울렸다. “아빠, 일어났어?” 높은 목소리가 하늘까지 뻗는 것 같더니 그 몸이 옆으로 도르르 굴러서 켄마 몸 옆으로 떨어졌다. 에이키가 꼼질거리더니 켄마의 팔을 꼭 안았다. “오늘 뭐 먹어?” 자긴 이제 막 눈을 떴는데 아인 벌써 밥 먹을 생각이 가득 찬 모양이었다. 켄마는 웃으면서 손을 내밀어 에이키의 볼을 쓰다듬었다. “배 많이 고파?” 물어보니 에이키가 “아니?” 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꿈에서 맛있는 식빵 먹는 꿈 꿨어.”

“맛있는 식빵?”

“응. 그 왜에-. 달걀 색 식빵.”

아아, 프렌치토스트 이야기구나. 어제 장을 보면서 식빵을 보고 에이키가 전에 먹었던 그거 먹고 싶다고 얘기했던 게 떠올랐다. 그 때도 정말 좋아하는구나 싶었는데 꿈에서까지 나왔다니 안 해줄 수가 없었다. 켄마가 몸을 일으키자 에이키가 얼른 기어 올라와서 켄마에게 안겼다. 켄마는 에이키를 안은 채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한 번 자세를 바로잡고 고쳐 안으니 에이키가 켄마의 목에 제 팔을 감고 매달렸다. 에이키를 안고 방을 나오자 벌써부터 신이 나서 자주 보는 만화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발까지 까딱이며 들떠있는 에이키를 거실 소파에 내려놓자 에이키가 얼른 켄마의 볼에 입술로 꼭 눌렀다. 오늘 정말 에이키가 기분이 좋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켄마는 에이키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주었다. 에이키는 눈을 접었다.

“그럼 해올 동안 에이키는 뭘 할 거야?”

“에이키는 음…. 아빠 기다리면서 모구모구 볼래.”

그래도 되냐고 올려다보는 눈은 켄마를 닮은, 노란 눈이었다. 켄마는 그 노란 눈을 자신의 노란 눈으로 가득 담아내다가 잔잔하게 미소를 짓고는 머리를 잠시 쓰다듬어주었다. 에이키가 눈을 살며시 감고 입술과 같이 호선을 그린다. 히히. 그렇게 웃는 소리가 입술 사이에서 삐져나오더니 켄마가 부엌 쪽으로 걸어가자마자 소파가 꺼지는 소리가 났다. “에이키, 눕지 말고 앉아서 봐.” 그 말에 “네에.” 하는 대답 소리가 들리고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따라 들린다. 켄마는 냉장고를 열고 어제 저녁에 넣어둔 밀폐용기를 꺼냈다. 저녁과 밤, 새벽 그리고 아침까지 달걀과 우유에 담가두었던 식빵은 한껏 그 물을 마시고 흐물흐물해져있었다. 달궈진 프라이팬에 조심히 옮기고 켄마는 기다렸다. “모구모구!” 에이키의 소리가 또 들렸다.

“에이키, 앉아서 봐야 돼.”

“켄마는 잔소리쟁이야. 가끔 아기들은 일어날 수도 있는데!”

그 말에 켄마는 또 웃고 말았다. 젓가락으로 식빵을 뒤집으며 웃음이 섞인 목소리를 애써 숨기려고 노력하며 켄마는 대답했다.

“에이키는 아직 아기야?”

“아니이! 켄마보다 아기라는 거지! 아이참.”

에이키는 그런 거 하나도 모르는 켄마가 답답한지 가슴을 작은 주먹으로 꽁꽁 쳤다. 입도 삐죽 내밀고는 눈썹도 세우고 머리는 산발이 되어 여기저기 뻗쳐있는 게 꼭 화난 고슴도치 같았다. 켄마는 잠시 뒤돌아서 에이키를 확인하고는 다시 미소 지으며 그릇에 토스트를 옮기기 시작했다. 설탕을 조금 뿌리는 걸로 마무리를 하고 켄마는 포크와 젓가락을 챙겨 거실로 향했다. 그리고는 소파 앞에 작게 놓아진 탁자에 올리고 탁자 앞에 앉았다.

“에이키.”

그리고 소중하게 불렀다. 에이키는 얼른 입술을 집어넣고 켄마를 동그랗게 바라본다. 그리고 웃었다. 얼른 소파에서 내려와 켄마에게 안겨서는 머리를 비벼댔다. 오늘은 정말로 에이키의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너무 좋아!” 에이키가 말했다. “왜냐며언, 꿈에서 먹은 거 꿈 말고 깨서도 먹잖아. 너무 행복해.” 먹을 것 하나, 그 사소한 거에도 이렇게 행복해하며 저를 안아주는 존재가 지금의 켄마에게는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에이키. 코즈메 에이키. 들숨과 날숨마다 에이키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고 아로새겼다.

“고마워.”

“응?”

“좋아해줘서.”

“응. 아빠도 고마워요. 에이키 맛있는 거 해줘서!”

아이는 웃으며 포크를 들었다. 그러다가 포크를 내려놓고 젓가락을 켄마에게 주었다. 항상 아이가 한 시간 정도 먼저 일어나니 분명 배고팠을 텐데도 오늘은 저에게 먼저 젓가락을 건네며 입술을 살짝 내밀기에, 켄마는 얼추 이유를 짐작하면서 식빵을 잘게 잘라 에이키에게 내밀었다.

“아니야.”

“…왜?”

“켄마가 아직 안 먹었잖아.”

아카아시 씨가 그랬어. 어른 먼저 먹고 나 먹는 거라고. 그래야 하는 거랬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많이 서운했는지 툴툴대는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예의. 켄마는 최근에 부쩍 아카아시가 에이키에게 예의범절을 가르치려고 하는 걸 알고 있었다. 딱히 지적은 하지 않았지만 켄마는 웃으며 “괜찮아.”라고 말하며 에이키의 입가에 다시 한번 젓가락을 내밀었다.

“나에게는 괜찮아.”

“…진짜?”

“응. 나는 에이키가 먼저 먹어도 서운하지 않으니까.”

자, 아-. 켄마가 입을 벌리자 에이키도 결국 따라서 입을 벌렸다. 그리고 입에 넣어주자 입을 다시 닫고 얼른 허겁지겁 씹기 시작했다. “천천히.” 혹시나 체하거나 사레들릴까 싶어 켄마는 에이키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켄마는 왜 안 서운해?”

“에이키가 좋으니까.”

“으히히. 나도 켄마가 먼저 먹어도 안 나빠. 나도 켄마 조아.”

그러다가 에이키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와 동시에 프렌치토스트를 공격하던 포크질이 점점 둔해지기 시작하더니 곧 멈췄다.

“그럼 아카아시 씨는 나 싫어해?”

“그런 건 아냐.”

역시나 그렇게 흐름이 흘러가는 걸 보고 켄마는 한 입 정도로 잘 찢은 조각을 또 에이키 입에 넣어주었다. 아마 아카아시가 보면 이제 더 이상 아기가 아닌데도 과보호를 한다며 혼냈을 상황이었겠지만 켄마는 자기가 조금 수고스럽더라도 이게 좋았다. 귀찮아도 그냥 이게 너무 좋았다.

“예절이라는 건 좋은 어른이라는 걸 보여주는 거거든.”

“어른?”

“아카아시는 에이키가 좋은 어른이 되었으면 해서 가르치는 거야.”

“그럼 아카아시 씨는?”

“으음…. 아카아시 정도면 꽤?”

“그럼 아빠는…? 아빠도 좋은 사람이야?”

켄마는 그 질문에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잠깐 입술로 웃기만 했다.

“…나는….”

복받치는 기분이 들며 눈에 힘이 들어갔다. 켄마의 올라갔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더니 곧 내려와 수평을 겨우 그렸다. 아이에겐 거짓말하면 안 돼. 야쿠 군의 말이 떠올랐다. 원래도 거짓말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제 말에 의심을 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믿는 아기의 손을 잡고 켄마는 절대로 에이키에게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노라 결심했었다. 켄마는 숨을 내쉬었다.

“그럼 아카아시 씨가 더 강해, 아빠가 더 강해?”

에이키는 성급하게 질문을 바꾸고 켄마를 반짝이며 바라보았다. “예의로는 강하고 약하고를 나누는 게 아냐.” 켄마는 그렇게 말해주며 우유를 마시고 입가에 묻은 걸 손으로 훑으며 닦아주었다.

“좀 더 엄격한 건 아카아시.”

“엄….”

“엄격. 규칙에 착실하게 따른다는 이야기야.”

“엄…껴….”

잘 발음이 되지 않는지 버벅이던 에이키는 곧 화제를 바꾸었다.

“켄마는 어떤 모구모구가 조아?”

“에이키는?”

“또 똑같은 거 하려고 하지?”

“들켰네.”

에이키가 볼에 바람을 불어넣고 빵빵하게 부풀렸다. 켄마는 저를 다시 웃게 하는 에이키에게 감사해야할지 아니면 또 어린 아이에게 눈치를 보게 해서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망설이며 다시 빵을 한입크기로 잘라 아이의 입 앞에 건넸다. 에이키는 조금 움찔하더니 결국은 입을 열어 받아먹었다.

“아빠는 쿠로모구 좋아할 거 같아.”

“왜?”

“음…아빠는 검은 거 좋아하니까.”

켄마는 입을 다물었다. 저렇게 말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켄마가 개인적으로 사는 물건은 모두 검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다이어리마저 검은 가죽으로 된 것만 몇 개나 사고 있었기 때문에 어린 에이키의 눈에는 제 아빠는 검정을 좋아한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다. “그렇네.” 켄마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냥 가만히 입을 닦아주었다. 그 때 벨이 울려서 에이키는 얼른 허겁지겁 현관으로 뛰어나갔다. “누구세요!” 이미 누군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아이는 얼굴에 한가득 미소를 지으며 인터폰을 들었다. 그러고는 문을 여는 버튼을 눌렀다. 곧 현관문까지 열리고

“에이-키!”

“야쿠 씨! 리에푸 씨!”

“뭐하고 있었어?”

리에프는 얼른 팔을 뻗었고 에이키가 매달리듯이 안기는 걸 옆에서 보고 있던 야쿠는 에이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묻고는 신발을 벗고 이제는 뒷전이 된 켄마에게 뒤늦게 인사했다. 그리고는 켄마 손에 들고 있는 젓가락과 토스트를 보며 혀를 한번 찼다.

“또 먹여주고 있었구나. 이건 켄마가 혼나야겠네.”

“아냐, 아냐. 아빠 혼내지 마아!”

얼른 에이키가 울며불며 다리를 버둥거리며 야쿠가 행여나 켄마를 혼낼까 싶어 안달이 났다. 으어어. 결국 가짜울음까지 터트리면서 켄마에게 팔을 뻗어대는 통에 리에프가 몸을 낮췄고 켄마가 결국 큭큭 웃으며 에이키를 받았다. 아뽜아-! 통곡을 하는 에이키에게 야쿠도 웃으며 에이키의 머릴 쓰다듬었다. “그럼 이제 에이키가 혼자 먹을 수 있어?” 그렇게 말하자마자 에이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짜 울었는지 눈물이 끝에 겨우 그렁그렁 매달린 채로 켄마 품에서 내려와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러다가 야쿠 선배 싫어하겠어여. 그만 놀려요.”

리에프는 벌써 소파에 앉아, 만나자마자 에이키를 울린 야쿠에게 한마디 했다. “괜찮아. 그런 걸로 에이키가 날 싫어할 리가 없지. 그치?” 그렇게 말하자 에이키는 대답을 않았다. “에이키!” 야쿠가 조금 서운한 목소리로 에이키를 부르자 그제야 히히 웃으면서 조막만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야쿠 씨가 밥 먹을 땐 말하는 거 아니래써요.”

“…그래서 너 정말로 나 싫어하는 거 아니지? 오늘도 같이 논다고 왔는데.”

“리에프도?”

“아녀! 저는 조금 있다 나가여. 한…11시쯤 나가면 될 걸요.”

모델로 아예 전향해버린 리에프는 시계를 한 번 보고는 그렇게 말했다. “야쿠 선배 태워다 드릴 겸 저도 오랜만에 에이키 보러 왔져.” 켄마는 여전히 구김살 없이 환히 웃는 리에프를 보고 몸을 일으켰다. 에이키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늘수록 켄마는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 그런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이렇게 손님으로 차 한 잔 내주는 게 고작이었다.

“어떤 거 줄까?”

“아, 저는 카페라떼요~!”

“응, 리에프 녹차.”

눈치 없는 것도 여전했다. 기어오르는 게 순식간이라 조금만 잘해주려고 해도 저렇게 나오니. 리에프가 에엑, 하며 표정을 찡그리자 그게 웃긴지 에이키의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켄마가 커피포트에 물을 담고 컵을 꺼냈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곧 나더니 딸깍하고 스위치가 내려갔다. 잔을 예열하며 저번에 선물로 받은 티백 세트 상자를 열었다. 티백을 담그고 아래위로 조심스레 흔들고 나서 나갈 때에는

“그래서 켄마는 쿠로모구가 좋대.”

“…그래?”

떨떠름하게 웃는 야쿠가 있었다. 그러다가 켄마가 온 걸 보고 괜히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켄마가 먼저 넌지시 웃었다. 바람 분다고는 하지만 아직 여름이고 에이키가 있어서 미지근하게 했어. 그렇게 말하며 찻잔을 건네자 그래도 다들 에이키에 쏟을까 싶어 조심스럽게 받았다.

“켄마는 검정 좋아하지? 머리도 검은 색이고!”

“…에이키.”

야쿠가 에이키를 말리려고 했지만 그 틈에 리에프가 먼저 끼어들었다.

“에이, 그래도 역시 켄마 선배는 빨간 색이지. 그쳐?”

“빨강?”

“응. 네코마는 빨간 색이니까! 켄마 선배가 져지나 경기복 입으면 완전 멋있었다구. 거기다가 머리도 노랗게 물들여서! 엄청 고양이 같았어!”

“우와…! 아빠 머리, 노란 색이었어?”

보고 싶다면서 반짝반짝 저를 올려다보는데 켄마는 어정쩡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표정을 보고 야쿠가 눈치를 보던 것도 잊고 푸훅 웃음을 터트리며 옆에 있는 리에프를 팡팡 쳤다.

“코즈메 켄마의 가장 반항기 때 모습이 눈에 훤한데~.”

“…놀리지 마, 야쿠 군.”

“맞아여. 사람은 그렇게 다 한번쯤 사춘기가 오는 법이라구여.”

“리에프, 거기까지 해.”

“그럼 아빠는 빨강이 더 조아? 검정보다?”

에이키의 말에 켄마는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저렇게 강한 사람이 에이키 앞에서는 쩔쩔매니 리에프는 그걸 보는 게 낙이라는 것처럼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러나 야쿠는 괜히 차를 마시는 척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나는….”

켄마가 목소리를 낮춰서 에이키에게 대답해주었다. 에이키는 소곤거리는 목소리에 눈을 깜빡이다가 환하게 웃었다. “마저 먹자, 에이키.” 그렇게 조곤조곤 말하는 목소리에 에이키는 이제 얼마 남지 않는 토스트를 포크로 찍었다. 리에프만 이제 슬쩍 시선을 돌려 야쿠를 바라볼 뿐이었다.




쿠로오는 또 목에 손이 절로 갔다. 오늘도 역시 그 답답해보이던 넥타이가 없자 이젠 같은 부서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차마 대놓고 물어보기는 어려웠는지 어제에 비해 더 말쑥한 차림으로 나타난 쿠로오를 두고 혹시 만나는 사람이 생긴 건 아닌지 말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런 질문들은 모두 히나타에게로 쏟아졌다. 히나타는 연신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아니라고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런 사정이 좀 있어서요.’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멘트라 다들 분명히 만나는 사람이 생긴 거라고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오늘따라 네가 고생이 많네.”

“…알면 좀 대신 말해주세요, 선배~.”

휴게실로 도망 나온 히나타에게 커피를 내밀며 쿠로오는 웃었다. 찡얼거리던 히나타도 결국은 따라 웃으며 “잘 먹겠습니다.”라고 인사했다.

“이야기는 다 들었어요.”

“응.”

“오늘 엄청 떨리겠네요. 쿠로오 선배.”

“…응.”

“그…. 에이키가 낯을 가리긴 하지만 야쿠 씨도 같이 나오신다니까요. 워낙 어른들하고 많이 지내서 아마 그렇게 겁내진 않을 거예요.”

그 외에도 히나타는 손짓 발짓을 다 해가며 에이키 이야기를 이어갔다. 쿠로오는 히나타가 그러고 보니 맏이였다는 것과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동생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에이키를 돌봐준 사람 중 한 사람이라는 걸 떠올렸다. 히나타의 이야기는 어제 보았던 에이키와 같은 이야기가 있기도 했고 또 의외의 이야기도 해주기도 했다. 나를 닮았구나 싶은 이야기도 나오고 또 켄마를 닮았구나 싶은 이야기도 나오자 쿠로오는 계속 히나타의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러자 히나타가 어색하게 웃으며 쿠로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쿠로오가 그렇게 대답하자 히나타가 말했다.

“뭔가 새삼스럽지만 이런 순간이 오네요.”

“…….”

“아, 그, 나쁜 뜻이 아니라요! 그러니까 제 말은….”

그렇게 말하며 히나타는 우는 것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쿠로오는 그 표정을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한참을 가만히 그렇게 서 있던 히나타는 결국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겨우겨우 목소리를 쥐어짰다. “미안해요.” 그 말에는 여러 가지가 담겨 있었다. 내내 비밀로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이 굴다가 이제야 폭탄처럼 에이키를 보여준 것, 그리고 쿠로오보다 더 에이키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사실, 기회가 없었더라면 계속해서 숨길 생각이었다는 마음과 이때까지 쿠로오가 힘든 걸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비겁함과 옹졸함…. 그 외에도 아마 많은 게 담겼을 사과였다.

쿠로오는 커피만 마셨다. 커피가 썼다. 배신감도 들고 화도 나기도 했지만 쿠로오는 그걸 굳이 히나타와 아카아시, 야쿠에게 풀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묵묵히 커피와 함께 그 쓴 감정들을 삼키며 잠시 히나타 얼굴을 안 보는 것으로 참아냈다. 내가 감히 그런 걸 느껴도 되냐는 죄책감과 죄악감에 쿠로오는 속이 따가웠다. 다시 한번 목을 한 손으로 감쌌다. 좀 더 조여 오려고 할 때쯤 히나타가 “그래도.” 라고 말했다. 쿠로오는 히나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경기할 때 자주 보았던 단호한 눈을 보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히나타는 그 눈으로 쿠로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저는 기왕이라면 지금이 맞다고 생각해요.”

쿠로오 선배가 괴롭겠지만, 그래도 지금 말씀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다시 한번 중얼거리듯이 말하며 히나타는 커피를 마셨다.

“잘 마셨습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리고는 히나타는 먼저 들어갔다. 쿠로오는 그런 히나타를 눈으로 쫓다가 다시 휴게실 바닥을 바라보았다가 아직 커피가 남은 종이컵을 눈에 담았다가 결국은 눈을 감았다. 커피를 옆에 내려놓고 머리를 붙잡았다.

밉다거나 나한테 왜 그러냐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눈물이 났고 겁이 났다. 열심히 피하던 그 한 발짝. 그 한 발짝을 지금 아니면 안 된다며 당기고 미는 사람들. 쿠로오는 무서웠다. 에이키. 어제 아이의 이름을 부르던 사람의 목소리가 귀에 자꾸 맴돌았다. 에이키. 어제 아이에게 손을 내밀던 사람의 손길이 자꾸 눈에 밟혔다. 에이키. 아는 사람. 그렇게 찾아 헤매고도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만 계속 떠올라서 속이 더부룩하면서도 자꾸 허했기 때문이었다. 쿠로. 저를 부르던 그 목소리와 너무 닮아서 자꾸 행복했던 때가 떠오르고 그 행복했던 때를 생각하다가 불현듯 끔찍했던 빈 방이 떠오르고 추운 겨울날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이름을 부르던 그 때의 공포가 목을 콱 죄어서…. 쿠로오는 그냥 겁이 났다. 부드럽게 부르던 목소리가 여전히 부드럽게 다른 이름을 부르고 있는데 그것마저 깨져 버릴까봐 두려웠다.

케….

또 차마 이름을 꺼내지도 못했다. 쿠로오는 입술을 씹어 삼킬 기세로 짓이겼다. 무서워. 쿠로오는 빈 집이었던 그 곳이 자꾸 떠올라서 숨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진동이 울리는 폰을 꼭 쥐고 쿠로오는 벌벌 떨었다. 입김이 나오는 것을 느끼며 어떻게든 몸을 진정시키려 눈을 꼭 감고 숨을 일부러 쉬었다. 숨 쉬는 것에만 집중하다가도 결국 콜록거리며 목을 다시 또 감쌌다. 목에 힘이 들어가며 다른 손으로 쿠로오는 제 폰을 확인했다. 야쿠였다.

[힘든 거 알아. 그래도 약속 잊지 마.]

나쁜 새끼.

결국 쿠로오는 그렇게 말하며 웃어버렸다. 용케 울지 않고 웃었다. 쿠로오는 숨을 내쉬었다. 입김이 금세 녹아 후덥지근한 더운 숨이 되었다. 야쿠가 뒤이어 보낸 사진을 한 번 엄지로 쓸었다가 쿠로오는 결국 그 사진을 클릭했다. 화면이 그 사진으로 가득 찼다. 얼굴을 잔뜩 찡그려서 활짝 웃은 아이의 웃음. 아이의 미소는 이상하게도 어디서 본 것 같은 그리움도 묻어있었다.

머리…마저 닮았구나.

쿠로오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리저리 뻗친 아이의 머리를 보고 웃었다가 다시 미소를 지웠다. 지워버리고 몸을 일으켰다. 다 식어 밍밍해진 커피를 다 마셔버리고 컵을 버렸다. 휴게실을 나서기 전에 쿠로오는 다시 숨을 쉬었다. 더운 공기가 코끝에 맴돌았다. 여름이었다. 쿠로오의 입과 눈에 둥근 곡선이 그려졌다. 에이키. 쿠로오는 어젯밤부터 계속 되뇌었던 이름을 또 입에 담았다. 에이키. 거의 한 걸음에 한 번씩 부를 정도였다. 여전히 그 이름을 떠올릴 때면 귀 한쪽에서는 낮지만 사랑이 묻은 목소리가 같이 울렸다. 그 목소리를 묻히려 쿠로오는 더 그 이름에 집중했다.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쿠로오는 팀장님께 외근을 알렸다. 점심도 아예 먹고 오냐는 질문에 그럴 것 같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 점심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점심시간에 맞춰 출발하는 쿠로오에게 작게 파이팅을 외치며 주먹을 들어 보이는 히나타를 보고 피식 웃어주었다. 그리고 나가는 복도에서 여전히 삐뚜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보쿠토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나쳤다. 회사 밖을 나가자 열기가 느껴졌다.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가장 위의 단추 하나를 풀고는 걸었다. 걷다가 고개를 들었다. 회사 차를 빌릴 걸 그랬나. 그러다가도 그 생각이 또 웃겨서 다시 걸었다.

차를 사고 싶어질 날이 오다니.

쿠로오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에 코끝에 눈이 올라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신나면서도 계속 불안해져서 자꾸 목의 단추를 풀었다가 잠갔다가 반복했다. 결국 손으로 목을 감싸고 쿠로오는 조금 미적지근한 미소를 짓고 버스에 올랐다. 차창 밖에는 어제 봤던 풍경들이 익숙하면서도 생소하게 지나갔다. 김이 서릴 리 없는데도 쿠로오는 자꾸 창문에 한숨을 내뱉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더운 걸 느끼고서야 쿠로오는 지금이 여름이라는 걸 다시 떠올렸다. 여름이지. 걸어 올라가는데 숨이 턱턱 막혔다. 그렇게 몇 번을 풀고 채워서 약간 늘어난 단춧구멍이 결국 다시 풀어졌다. 그러면서도 괜히 아쉬워서 쿠로오는 손을 제 목에 대고 가볍게 쥐었다. 놀이터의 모래가 햇빛에 반짝였다. 여름이야. 이제는 거의 주문을 외우는 수준으로 쿠로오는 생각하고 상기하고 되뇌었다. 겨울이 아니야. 더운 숨을 몰아쉬면서도, 더워서 헥헥 거리면서도 그렇게 생각해야 겨우 몸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덜덜 떨지 않게끔 주의하면서 쿠로오는 고개를 들었다.

“딱 맞춰 왔네!”

야쿠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손을 들고 공중에 젓는 야쿠는 웃고 있었지만 손을 내리면서 잠시 한숨을 쉬는 걸 보고 야쿠도 제법 긴장했다는 걸 알아챘다. 야쿠의 다른 손은 야쿠 다리 근처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저를 바라보는 아이의 등에 올려져 있었다. 쿠로오는 멈칫거리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노란 눈. 노란 눈이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에이키, 인사해. 내 친구….”

야쿠는 말을 하다말고 쿠로오를 살폈다. 뭐라고 인사를 시켜야할지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쿠로오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갑자기 저와 시선이 맞춰지자 아이가 당황한 모양인지 야쿠의 바지를 잡았다. 노란 눈에 자기가 비치고 있었다. 쿠로오는 이 눈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말할 수 있었다.

“안녕. 네가 야쿠 친구구나.”

“…응.”

야쿠 친구라는 말에 아이가 야쿠를 올려봤다가 금방 화색이 돌며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자긴 어른이라서 친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는데 야쿠가 웃어주니 그게 기뻤던 모양이었다.

“아저씨는 누구예요?”

“…아저씨….”

야쿠가 고개를 돌려서는 입을 가리고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쿠로오는 다른 의미로 숨이 턱 막혔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너에게만큼은 아저씨라는 말을 듣고 싶진 않았는데…. 울어야할지 아니면 그래도 이렇게 아저씨라고 불러주니 좋아해야할지 감이 오지 않아서 쿠로오는 어색한 미소로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이가 야쿠를 올려보고 손을 멈칫거리며 냈다.

“아저씨는 얏쿵 친구야.”

“야…쿵?”

“그게 언제 적 별명이냐. 고등학교 이후로는 처음 듣는 것 같다?”

야쿠가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에이키가 눈을 크게 뜨고 고등학교…라고 중얼거리더니 “그럼 아저씨도 네코마예요?”라고 물어봤다. 쿠로오는 웃었다. “응.” 하마터면 그 팀 주장이었다는 말을 할 뻔했다가 겨우 그 말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키의 눈이 햇빛을 받은 모래보다 더 반짝였다.

“와! 아저씨도 네코마구나!”

에이키는 얼른 쿠로오의 손을 잡고는 붕붕 흔들었다. 일부러 힘을 빼고 아이의 속도에 맞춰 손을 흔들어주던 쿠로오는 에이키가 잡은 손가락이 뜨거울 정도로 따뜻하고 아플 정도로 압박감이 들었다.

“그럼 오늘은 아저씨도 같이 놀아? 에이키랑 놀 수 이써요?”

“그럼. 일부러 그래서 지금 왔는걸.”

“진짜? 왜?”

에이키의 의미 없는 ‘왜’라는 질문에 쿠로오는 심장이 터질 것 같고 폐에 비수가 찔린 느낌이었다. 쿠로오는 에이키와 악수했던 오른손을 가슴에 올렸다. 모래같이 꺼슬꺼슬한 숨을 내뱉으며 쿠로오는 웃었다.

“에이키랑 친구하고 싶어서.”

“…왜에?”

“왜? 에이키는 싫어? 아저씨가 친구하자고 해서?”

“으응, 그건 아닌데….”

그러고는 야쿠를 바라보았다. 아, 야쿠는 왜 자신을 보는지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짓고는 에이키 옆에 쿠로오처럼 같이 쪼그려 앉았다. “이 아저씨는 괜찮아. 이 아저씨는 나랑도 알고 아카아시랑도 알고 히나타랑도 알고 다 친하거든. 그러니까 이 아저씨랑은 친구해도 괜찮아.” 하지만 다른 아저씨는 안 된다며 야쿠는 약속을 받았다. 혼란스러워보였지만 일단 야쿠가 괜찮다고 하니 에이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저도 따라서 쪼그려 앉았다.

“그럼 아빠랑도 알아?”

“그….”

야쿠는 또 말을 잇지 못했다. 쿠로오가 그래서 대신 대답했다.

“그럼. 그런데 너희 아빠는 날 모를지도 몰라.”

“왜?”

“…별로 안 친하거든.”

“…왜? 싸워떠?”

쿠로오는 그런 에이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를 쓰다듬으니 눈을 반쯤 감는 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끌어안고 울고 싶은 기분을 꾹 참으며 쿠로오는 겨우 머리만 두어 번 쓰다듬고 말았다. 그리고는 툭툭 털고 일어났다. 어른이 되면서도 키가 커서 190cm가 넘게 된 쿠로오가 일어서자 야쿠에게까지 그림자가 지기 시작했다. 에이키가 “우와!” 하면서 얼른 따라 일어섰다. “아저씨 엄청 크다아. 리에푸 씨보다도 더 커요?” 그렇게 말하면서 팔짝팔짝 뛰기에 쿠로오는 허리를 살짝 숙여 “리에프 그 녀석은 키만 컸지, 완전 못해. 내 아래야 아래.” 그렇게 말했다. “진짜아? 리에푸 씨보다 더 강해요?” 그렇게 말하면서 야쿠를 돌아보는데 야쿠가 픽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당연하지. 걔를 가르친 사람이 쟤인걸.”

“우와! 그럼 리에푸 씨 성생님이야? 나도 그럼 키 클 수 있어요?”

키는 가르친다고 느는 게 아니지만 에이키는 아직 아기였다. 쿠로오는 웃었다. 야쿠가 조금 놀랄 정도로 환히 웃으며 에이키의 손을 맞잡았다.

“그럼, 너도 엄청 클 걸.”

어른이 되어서도 클 거라며 쿠로오는 에이키를 들었다. 에이키가 손이 잡힌 채로 데롱데롱 매달려서 눈을 반짝였다. 공중에서 발을 버둥버둥 거리더니 아하하 웃었다. 그러고는 아예 매달릴 생각인지 다리를 동그랗게 말았다. “아저씨처럼?” 야쿠는 이젠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쿠로오는 제 손을 잡고 매달린 아이를 떨어뜨리지 않을 정도로 흔들흔들 흔들었다. “응.” 확신에 찬 목소리에 에이키는 웃었다. 다시 바닥에 에이키를 내려놓자 에이키는 이제 쿠로오와 친해진 모양인지 쿠로오의 손을 덥석 잡았다.

“우리 미끄럼틀 타요!”

“그럴까?”

“위험하니까 뛰지 말고!”

“야쿠 씨는 잔소리쟁이야~!”

“너 그 말, 누구에게 배웠어! 리에프지!” 야쿠의 고함 소리에 에이키뿐만 아니라 쿠로오도 웃었다. 아, 덥다. 쿠로오의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그 말이 툭 튀어나왔다. 그러자 에이키가 따라서 “엄청 덥죠!”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씩 웃었다. 사진보다 더 환했다. 쿠로오도 따라 웃었다. “그러네.” 그렇게 말하며 웃었더니 마침 미끄럼틀 위에 바람이 불었다. 시원한 바람이었다.